“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야고보서 1:19-21).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야고보 사도는 20절에서 "성 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라고 말한 후에 21절에서 그 원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쉽게 격분하는 이유는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쉽게 분을 내는 건 그 사람의 내면에 더럽고 악한 생각이 넘치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사람은 쉽게 분을 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습관적이었던 사나운 태도를 버릴 수 있습니다.

잘못된 정욕이나 탐욕에 눈이 멀면, 조급하고 사나운 태도를 보이게 됩니다. 쉽게 분을 드러내는 가장 큰 이유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자신의 방법대로 자신을 목적으로 모든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자신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태도에는 관대하면서, 다른 사람의 잘못에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자신의 죄에 대해 해결되지 않은 죄책감과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는 불순종에 대한 불안, 그리고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들이 다른 사람에 대한 분노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쉽게 분노하는 습관을 버리려면, 무엇보다 먼저 마음속에 있는 "모든 더러운 것"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악한 습관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고 묻어둔 죄들을 청산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더러운 것들과 악한 것들이 흘러들어오는 미혹의 뿌리를 잘라내야 합니다.

'내버리고'라고 번역된 '아포떼메노이'라는 말은 벗어버리라는 뜻입니다. 문자 그대로 옷을 벗듯이 벗는 것입니다. 옷이 사람의 몸이 아니듯이, 원래 몸에 속하지 않은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벗어서 멀리 던져 놓으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깊어지면, 다시 말해 성령 충만해지면 자신에게서 거룩함만 보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 더 깊이 자각하게 됩니다. 벗어버리려면 입고 있는 것이 보여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보는 데 자신의 노력과 용기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은혜가 더해져야 합니다. 은혜가 더해지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은혜라고 생각하던 것도 탐욕에 뿌리를 둔 악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라고 굳게 믿고 있던 것들이 사실은 자기실현과 인정에 굶주린 탐욕이었다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를 새롭게 발견하게 됩니다.

누구나 신앙 여정 가운데 자기의 죄를 깊이 자각하게 되는 절망의 순간이 있습니다. 그것을 깨달으면, 결코 자기 자신에 대해 만족하거나 열광할 수 없게 됩니다. 성공의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쓰게 됩니다. 날마다 죄에 사로잡히는 자기 본연의 모습과 한계를 바라보며,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사람이 됩니다. 모든 분노는 자신이 옳다는 확신 속에서 증폭됩니다. 하지만 자신의 죄를 깨닫고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벗어버린 사람은 옛 방식으로 분노하지 않게 됩니다.

마음에 심긴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새로 입을 것이 없으면 입고 있던 것을 벗으려 하지 않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벗은 몸'을 극도의 수치로 여겼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후 자신이 벌거벗었음을 알고 수치스러워했습니다(창 3:10). 그가 잃어버린 것은 단순한 겉옷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의'의 옷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순종치 못해 벗은 몸이 된 것입니다. 그 후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와 영광'이 아닌 다른 것들로 자신들의 수치를 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수치일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고 세례 받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드디어 그 잃었던 '의와 영광'의 옷을 다시 입었음을 뜻합니다. 복음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고 떳떳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새 옷이 있으면 헌 옷을 벗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말합니다. '도'라고 번역된 단어는 18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말씀'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진리의 말씀을 입으라고 하지 않고 심긴 말씀을 받으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심긴'과 '받으라'라는 말을 통해 우리의 신앙은 수동형이라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를 가리고 있는 수치스러운 옷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 스스로 깨끗한 옷을 입고 있다고 아무리 주장해도 그것은 깨끗한 옷이 아닙니다. 그것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며 성령의 사역입니다.

입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스스로 입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심겨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심겨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을 온유함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는 우리의 태도에 제동을 걸 수 있습니다. 우리는 크고 위대한 일을 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할 것이라는 사단의 유혹을 늘 받습니다. 돌들로 떡이 되게 하는 유혹,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유혹, 천하만국을 다스리고 통치하고 싶은 유혹에 늘 흔들립니다. 사단은 인간의 능동적인 태도를 자극하여 인간 스스로 무언가를 이루어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심긴 하나님의 말씀은 그 반대의 길을 가라고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의 길을 좇을 수 없습니다. 날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지 않으면 마음에 심긴 하나님의 말씀은 싹이 틀 수 없고, 자랄 수 없고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그 심긴 말씀을 온유함으로(엔 프라우테티)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야고보 사도가 주장하는 영적, 도덕적, 윤리적 명령들의 핵심 원리입니다. 무엇보다 '온유함'이 그 열쇠입니다. 온유함으로 말씀을 끌어안아야 합니다. 풀과 꽃은 사라지고, 온 세상과 그 세상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사라질지라도 영원히 남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심긴 말씀을 온유한 마음과 삶으로 품어 정의와 평화 그리고 생명을 열매로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디아스포라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그렇게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들의 내면에는, 풀과 꽃처럼 사라질 세상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이 스러지고 난 후에도 영원히 서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의 씨앗, 곧 '썩지 않는 씨앗'이 심겨져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과 전혀 다른 존재들입니다. 영영히 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운명을 같이 할 사람들입니다.

비록 세상에 흩어져(디아스포라) 있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을 따르고 세상에 미혹되어 사망의 길을 갈 수 없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교회인 우리들은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우리들 안에 심긴 말씀의 씨앗들을 받아들여, 정의와 평화, 생명의 열매들을 맺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구원이고 존재이며 사명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흩어진 교회들에게 그들 안에 심긴 말씀을 어떻게 온유하게 받아들일 것인지, 세상 한복판에서 어떻게 그 심긴 말씀을 따라 의의 열매를 맺을 것인지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1장 2절에서 언급하기 시작한 시험의 문제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시험은 세상의 유혹, 정욕을 추구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그 밑에는 나뉜 마음, 곧 두 마음이 있습니다. 이 두 마음이 문제의 뿌리입니다. 이 두 마음이 해결되지 않으면 시험은 그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시기와 분냄과 다툼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두 마음의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야고보 사도는 신학적인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복음의 새로운 해석이기도 합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것을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께서 그를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신'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의 심령의 가장 큰 특징은 진리의 말씀, 곧 그 심령에 심긴 말씀입니다. 마음에 심긴 말씀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래서 마음을 염려합니다. 교회의 마음, 성도의 마음이 나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면서 동시에 세상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두 마음을 해결하겠습니까?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 해답을 복음에서 찾습니다. 먼저 하나님에게 찾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그분의 백성을 낳으셨고, 그들의 마음에 그분의 '영영히 서는 살아 있는 말씀'을 심으셨습니다. 그들의 가장 큰 특징은 그들의 심령 속에 심긴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입니다. 바로 그 말씀이 그들의 마음을 하나로 붙들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나뉘는 중인지도 모르지만 결코 두 마음으로 완전히 나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심령 속에 심긴 말씀을 버리는 일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심령을 하나로 붙들고 있는 것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그들 속에 심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도, 세상을 향한 마음도 바로 그 심긴 말씀이 붙들고 있습니다. 두 마음의 치유는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 진리의 말씀을 심어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이 흩어진 교회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인 두 마음에 대한 야고보 사도의 대답입니다. 치유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두 마음의 치유는 이미 모두의 마음속에 심긴 '진리의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심긴 말씀을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말씀에 순복해야 합니다. 그 길의 끝에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충만하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의 차이는 확연합니다.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입고 있는 사람과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은 사람은 확연하게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두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이스라엘이 성전과 산당을 함께 섬겼던 것처럼 영적 간음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벗어버리고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은 사람들일까요?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