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처럼 끝까지, 라합처럼 담대하게 복음을 행하여"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야고보서 2:20-26).

자기의 생각을 비울 수 있는 사람

사마천의 <사기열전>에 다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염구가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의로운 일을 들으면 바로 실천해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실천해야 한다." 자로가 물었습니다. "의로운 일을 들으면 바로 실천해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아버지와 형이 살아계신데 어찌 들은 것을 바로 실천하겠느냐?" 자화가 공자의 대답이 각기 다른 데 의아해하며 물었습니다. "감히 여쭙겠습니다. 어찌하여 같은 질문인데 달리 대답을 하십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염구는 머뭇거리는 성격이므로 앞으로 나아가게 해준 것이고, 자로는 지나치게 용감하므로 제지한 것이다."

하나님 백성들은 평화를 짓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지지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열린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흘러들어갈 때, 복음이 전해질 수 있고 진정한 믿음의 길로 다른 이들을 초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들을 수 있는 사람, 배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자신의 생각에 절대성을 부여하고 있는 오만함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은 라인홀드 니버의 <평정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제가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을 / 그대로 받아들이는 평정을 제게 주십시오. // 제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 변화시킬 수 용기를 제게 주십시오. // 서로의 차이를 알 수 있는 지혜를 제게 주십시오. // 하루를 살아도 한껏 살게 해주십시오. / 한순간을 즐겨도 한껏 즐기게 해주십시오. // 고난은 평화에 이르는 길임을 받아들이게 해주십시오. // 죄로 가득 찬 이 세상, 주님께서 그대로 끌어안으셨듯이 / 저도 이 세상을 제 뜻대로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 있는 그대로 끌어안게 해주십시오. // 제가 하나님의 뜻에 항복하기만 한다면 / 하나님께서는 만사를 다 올바로 이룩하실 것을 / 믿게 해주십시오. // 그리하여 제가 이 세상 사는 동안에는 / 소박한 행복을 누리고, / 지극한 행복은 영원한 나라에서 / 주님과 함께 누리게 해주십시오.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생각을 비울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할 때 야고보 사도의 말처럼 우리 안에 심긴 말씀을 온유하게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라인홀드 니버의 기도처럼 서로의 차이를 알 수 있는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께서 만사를 올바로 이룩하실 것을 믿는 사람이 될 때 우리는 평화를 지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런 우리들을 당신의 도구로 삼아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실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이 하나 된 신앙

신학은 시대와 상황의 산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종교 개혁 당시에 루터는 수도승이었고 영적 훈련에 매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느날 그는 영적 훈련, 다시 말해 행함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 루터가 살던 시기는 가톨릭이 면죄부를 팔아 베드로 대성당을 지으려 하던 때였습니다. 면죄부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그 시대의 신학이었습니다. 루터는 면죄부의 잘못을 인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행함이 하나 된 신앙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행함을 강조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십자가의 공로를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루터의 시대와 상황 속에서는 '오직 믿음'이 타당한 신학이었습니다.

그러한 루터의 신학은 오늘날 개신교가 가지게 된 무책임한 구원론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무조건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개신교의 맹신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물론 루터는 그러한 신앙을 염두에 둔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오직 믿음'의 신학은 또 다른 면죄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면 그 다음부터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면죄부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제 행함이 강조되는 신학이 출현해야 할 시대와 상황이 되었습니다. 루터의 '오직 믿음'과 사도 바울의 '이신 칭의'는 믿음과 행함을 분리한 적이 없습니다. 인간의 탐욕과 사단의 간교함이 그 둘을 분리시킨 것입니다. 이제 다시 야고보 사도의 말을 따라 행함을 강조한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 없이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을 "허탄한 사람"이라고 부르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이라고 말하며 두 사람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기생 라합입니다.

램브란트 작 -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을 말리는 천사(출처 - 위키피디아)

아브라함

야고보 사도는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외아들 이삭을 바친 사건을 믿음과 행함이 일치한 증거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그런 행동은 기나긴 믿음의 여정을 거친 다음에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고 명령하셨습니다. 믿음의 여정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동안 익숙했던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미지의 세계로 떠나야 합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은 아무리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어도 익숙한 장소에서 떠나지 않으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여정에 들어서는 건 불안한 일입니다. 게다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야 하는 길입니다.

그 일이 불안하기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거주지였던 갈대아 우르를 떠났지만 갈대아와 엇비슷한 하란에 머물게 됩니다. 하란은 우르와 자매도시였습니다. 하란도 우르와 같이 달의 신 '난나'를 섬기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두 도시를 늘 왕래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경제적으로 우르는 침체기에 있었지만, 하란은 번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던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식솔들을 이끌고 그곳에 자리를 잡았던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첫 출발은 실패였습니다.

데라가 죽은 후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두 번째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은 두 번째 부르심을 받은 75세부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르심에 실패한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이 아브라함이라면, 신약의 대표적인 인물은 베드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구약을 대표하는 이들이 첫 번째 부르심에 실패했다면, 우리는 더욱 부족하고 연약하기에 하나님의 귀하신 부르심에 불완전하게 응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부르십니다. 아브라함과 베드로를 다시 불러주셨듯이 우리가 실패했을 때도 우리를 다시 불러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을까요? 만일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도 여전히 하란 땅에 머물고 있다면, 우리는 두 번째 부르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우리의 순례는 궤도에 오르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궤도에 들어선 후,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모리아 산 사건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40여 년입니다. 그동안 아브라함은 아홉 번의 실패를 다시 경험합니다.

믿음의 길에 들어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이 실패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실패는 좌절과 퇴보가 아니라 자유를 향한 전진입니다. 아브라함처럼 거듭되는 실패를 통해 배우고 또 배울 때 온전한 믿음에 도달하게 됩니다.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믿음과 행함이 하나 되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고백으로 끝나는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이어지는 험난하고 기나긴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길을 떠났다고 해서 우리의 믿음이 온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고, 마침내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목적지임을 깨달아 그분과 온전히 동행하게 될 때, 우리의 믿음은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고, 믿음과 행함이 하나 된 신앙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패를 경험할 때마다 겸손하게 배우고 자신을 낮추는 순례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임스 리솟 작, 라합과 두 정탐꾼(출처 - 위키피디아)

라합

아브라함과 더불어 믿음과 행함이 하나 된 사람의 예로 선택된 사람이 라합이라는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는 파격적입니다. 그녀는 이방인이며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전혀 차별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문이 모든 이들에게 개방되었다고 해도,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처럼 보이지 않는 거리낌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는 이방 여인 출신의 라합을 예로 들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라합은 소문으로만 듣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라합은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고 피할 길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라합의 그러한 행함이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헤아린 것입니다. 라합은 목숨을 담보로 한 행함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입증해 보였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요구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의 여정은 생명을 걸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입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난 아브라함과 민족의 반역자로 붙잡혀 죽임을 당할 수 있었지만 믿음이 요구하는 바를 행동으로 보인 라합에게서 죽음도 불사하는 결단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것은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서 보았던 믿음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으로 왕 앞에 나아간 에스더에게서 보았던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에게서 보았던 믿음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2장에서 보게 되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단호한 결단을 요구합니다.

또 한 가지 이방 여인 라합이 야고보 사도에게 아브라함과 똑같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거꾸로 된 나라입니다. 작은 자가 큰 자 되고, 낮은 자가 높은 자 되는 곳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높고 낮음이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똑같은 높이로 맞춥니다. 서로 낮아지려 하기에 모두가 높아지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입니다.

영혼 있는 몸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영혼이 없는 몸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영혼과 몸의 비유는 유대 기독교적인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은 몸과 생기(숨, 영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창 2:7). 그 중 어느 한 가지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몸과 영혼이 분리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과 행함 역시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행함이 없는 믿음입니다. 커다란 건물과 화려한 예배와 치적을 내세우지만, 그것은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행함이 아닙니다. 또한 나중에 여건이 갖추어지고 믿음이 성숙해지면 말씀대로 살겠다고 생각한다든지,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서 배우고 깨달은 것들을 실천하지 않고 묻어둔다면, 그 역시 영혼 없는 몸이 되고, 죽은 믿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행함 만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거짓말과 지켜지지 않은 약속들로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이 곧 우리의 믿음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우리의 삶이 자린고비처럼 인색하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자비의 크기입니다. 우리의 삶이 정욕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이 곧 우리의 믿음이 누리는 영적 자유의 높이입니다. 우리의 삶이 세속적이고 헛된 자랑으로 가득하다면, 그것이 곧 우리의 믿음이 받은 영광의 크기입니다. 우리의 삶이 다툼과 분란으로 가득하다면,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의 긍휼과 용서의 깊이입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과연 우리의 믿음은 살아 있는 믿음일까요?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아브라함처럼 끝까지, 라합처럼 담대하게 복음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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