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성경은, 캐나다 리젠트 칼리지의 영성학자인 고든 스미스가 정리한 대로, “우리에게 진리를 알고 이해시키고 우리의 믿음과 지혜가 자라게 하기 위함이다.” 성경은 우리가 분별할 때 필요한 원리를 제공해 주지만, 시시콜콜한 사항들에 대해서 답을 주지는 않는다. “분별의 세부사항에 적용하기 위해 성경을 사용하는 것은 성경을 거스르는 것이다”라고 고든 스미스는 경고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제임스 패커 교수 역시, “어떤 성경본문도 내게 현재의 아내에게 청혼하라고 하거나, 목사 안수를 받으라고 하거나, 영국에서 사역을 시작하라거나, 내가 타고 다니는 크고 낡은 차를 사라고 한 적이 없다.”며, 성경이 우리를 대신해 직접적인 선택을 해줄 수는 없다고 말한다. 성경은 “우리들의 선택이 어떠한 적법한 가능성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바운더리를 정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패커 교수는 말한다. 성경이 일일이 코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뿐인가? 성경은 우리의 간절한 기도에 침묵하기도 한다.

굳이 비유하자면(이제부터 나의 이야기다), 성경은 아버지와 같은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식에게 아버지는 일일이 간섭하거나 정리하거나 결정해 주는 분이 아니다. 자식이 움직일 수 있는 큰 범위만 제시해 주신다. 그것을 자식들이 지켜야 할 성경의 계명이라고 해보자. 가까이 계시지만 먼 척하는 아버지는 중요한 결정이 필요한 그 순간에는 함께해 주신다. 『아버지는 늘 두 번째였죠』의 저자 윤문원의 말처럼, 아버지는 “시골의 느티나무처럼, 비탈길에 떡 버티고 서 있는 나무처럼, 덕을 베푸는 크나큰 이름”과 같다. 저자가 후기에서 표현하듯, “세월이 흘러도 가슴에 하나의 뜨거움으로 다가오는” 아버지. 변함없는 아버지.

자식의 삶에 일일이 끼어들어 조언하고 코치하고 안내자의 역할을 하는 분은 늘 어머니다. 어머니는 늘 자식과 함께하신다. 시험 준비를 하지 않아서 쩔쩔맬 때 위로해 주신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아프면 밤새 자식 곁을 지키신다. 물수건을 이마에 얹어 주신다. 어쩌다 옆집 친구와 다투고 자식의 마음이 언짢아지면 “빨리 잊으라”고 조언해 주신다. 자식에게 잘못했거나 상처를 준 사람을 고자질하면, 도리어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다. 도움이 필요하면 바로 달려오시는 분. 자식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자상한 분. 어머니.

너무 감상적인 비유인가? 성령은 어머니와 같다. 구체적이고 자상한 위로자의 모습이다. 이런 생각은 뜬금없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아람어에서 성령은 여성성이었다. 그런데 그리스어로는 남성성인 ‘파라클레토스’로 번역되었고, 요즈음 많은 번역본에서 성령을 남성성인 ‘He’ 로 칭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성 구분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성령이 어떤 분이고 우리가 성령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들의 분별은 성령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도움 정도가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분별의 문제들은 성령이 직접 다루시는 것이고, 우리는 성령이 우리 안과 밖에서 활동하시도록 우리를 열어 놓는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나는 성경주의자요, 객관주의자라니까! 그러니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성령은 믿지 않소.”라고 말하는 것은 인생을 분별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살겠다는 것이며, 결국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셈이 된다. 성령을 부인하거나 성령을 믿지 않는다면, 요한복음 14:20 말씀은 거짓이 된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이런 ‘상호내주함(mutual indwelling)’은, 하나님에 의해 보내진, 그래서 영원히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 안에 내주하심으로 우리의 삶에 관여하고 간섭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한 뜻을 알도록 인도하시는 진리의 영, 성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으면, 우리의 분별 의지는 결국 우리 자신의 의와 목적의 성취를 위한 자기 위선이나 가장(假裝)이나 기만이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령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 이는 비단 성도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자들의 책임이 더 크다고 봐야 한다. 초대교회의 교부들 역시 성령에 대해서 가르치길 꺼려했다. 특히 초심자를 대상으로 하는 성령 교육은 금기시되어 왔다. 그래서 요한 저자의 책들을 가장 나중에 다뤘다. 두 번의 밀레니엄이 지나는 동안, 여전히 우리는 성령에 대해 잘 모르고 있거나 다르게 해석하고 있기 십상이다.

왜 하필 요한복음이 문제인가?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인 마태, 마가, 누가복음과 시작부터 다르다. 세 공관복음서는 물리적인 예수의 물리적인 삶을 연대기적으로 다루지만, 요한복음은 독자들을 태초로 데려간다. 예수님은 말씀의 모습으로 창세부터 하나님과 같이 계셨다는 것이다.

요한 저자는 성육하신 예수님에 앞서 예수님의 신성부터 언급한다. 이런 예수님과 하나님의 동체성을 강조하는 ‘상호내주’의 신비를 불러오면서 다른 공관복음서와 차별을 두며, 아울러 이런 신비의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하는 성령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서를 통해 저자는 성령에 대한 신학적인 기초를 세우며 이런 질문들에 답을 한다. 성령이 어떤 분인가? 왜 성령이 오시는가? 그리고 우리에게는 왜 성령의 내주 혹은 임재하심이 왜 필요한가?

그럼에도 사람들은 성령이 누구이고, 성령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를 왜곡하지 않고 올바로 이해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성령은 오랫동안 신앙의 회색 지대에 존재해 왔다. 제임스 패커 교수는 그의 책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성령의 교리는 기독교 교리의 신데렐라”와 같다고 말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성령에 관심이 없다. 우리는 성령에 대해 공개적으로 혹은 공식석상에서 말하기를 꺼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요즈음 신자들에게 가장 덜 묻는 질문들은 이런 것들이다. “최근에 성령의 임재를 느낀 적이 있나요?”“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언제이지요?” “개인적으로 성령을 경험했을 때, 당신의 삶에 어떤 변화가 생겼습니까?”“당신이 만난 그분이 성령이시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합니까?”

이런 질문을 잘못하다가는 상대방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이런 소극성과 쑥스러움의 쓸쓸한 뒷면에는 성령에 대한 불신과 경험의 부재가 존재한다. 그들에게 성령이란 그냥 저기 계시는 분, 본인들과는 연관이 없고, 비현실적이며, 때로는 부엌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이 갑자기 그칠 때 느끼는 그런 섬뜩함 정도?

우리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지만, 캐나다 신학자이자 카리스마 운동의 선구자인 클락 피녹의 말처럼, 단지‘이위일체적인(binitarian) 방법으로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해 볼 일이다.” 성부와 성자에 대해서 알고 있는 만큼 성령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가? “하나님은 영이시다”(요 4:24)라는 고백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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