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기독교 복음은 선포되어야 하는 놀라운 메시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로마서 12:1).

기쁨을 잃어버린 기독교

즐거움 혹은 기쁨이라는 뜻의 헬라어들이 많지만, 이 구절에 나오는 기쁨은 헬라어 '힐라로테스'입니다. 환경이나 조건에 좌우되거나 신체적 움직임을 동반하는 종류의 기쁨이 아니라 '마음이 웃는다' 또는 '눈이 춤을 추다'와 같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와 감출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기쁨을 말합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이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에게서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표지이어야 할 기쁨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기쁨이 사라진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개인주의적인 문화 때문입니다. 오늘의 문화는 '나 홀로 문화'입니다. 신앙생활도 독립적으로 합니다. 공동체의 다른 지체들과 끈끈한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과 생명에 관한 복음의 기쁨을 매순간 경험하지 못합니다. 참된 공동체가 줄 수 있는 능력을 경험하지 못할 뿐 아니라 성령께서 주신 은사에 대한 청지기로서의 자아 실현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문화 속에서 친밀성과 정은 사라져가는 반면, 폭력과 범죄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까지 파고든 학교 폭력은 어른보다 더 대담하고 잔인해졌습니다. 그런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우리 사회는 더더욱 폭력적이 될 것입니다. 개인이나 나라 모두 친밀한 관계를 맺는 법에 대해 무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국면에 처해 있습니다. 세속 문화에 불만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참된 기독교 공동체는 새로운 대안사회를 제공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산업혁명을 지나 기술혁명 시대로 넘어오면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더욱 소원해졌습니다. 가족 단위로 이루어졌던 경제활동이 다양한 직업으로 분화되면서 가족의 응집력이 파괴되었고, 가족 구성원들이 사회생활에서 겪는 좌절과 혼란을 가정에까지 가져옴으로써 가정생활이 황폐해지고 있습니다. 가족이 함께 집안일을 하던 풍습은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텔레비전이 가족 오락 시간을 대체해 버렸고, 스마트 폰은 사람들을 각자 자신만의 공간 속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고스톱'조차 혼자 하는 게임이 되었고, 인터넷과 이메일이 보편화되면서 사람들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눌 필요성이 없어졌습니다.

이제 기술이 친밀성의 자리를 대체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사람들은 고도의 기술력으로 생산된 온갖 제품들에게서 친밀감을 얻으려고 합니다. 기술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성적 연합이 친밀감의 절정이자 상호 헌신된 언약의 관계였는데, 지금은 순간을 즐기기 위한 도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테크놀로지 문화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과거의 문화 타락 현상과 달라진 게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 시대처럼 오늘날에도 기독교 복음은 선포되어야만 하는 놀라운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우리가 행하게 되는 사랑, 자신의 성공적 공로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의 완전한 공로에 기초해 하나님께 전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믿음. 지금 이 세상은 그런 소망, 그런 사랑, 믿음의 기쁨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다가감으로

사도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가 되도록 격려하기 위해 로마의 가정교회들에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바울의 편지는 무관심과 기술적 삭막함과 불의로 점철된 이 시대에 필요한 돌봄과 기쁨의 신학을 제시합니다.

로마서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과도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교리를 강조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그분 앞에 평등합니다. 그 누구도 행위로 그분의 사랑을 얻을 수 없습니다. 스펙이나 능력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우리 각 사람을 사랑하기로 선택하십니다. 이 놀라운 사랑과 기쁨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더 큰 사랑을 베풀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따라서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는 교제는 하나님의 열정적 사랑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아예 부인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시려고 낮아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의미를 깨달을수록 참되고 기쁨 가득한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기를 소망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성령 충만한 관계를 맺고, 기쁨 기득한 공동체를 창조하셨던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은 그 방법들을 말해 줍니다. 돌봄의 삶에 대해 가르쳐 줍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보다 깊은 사랑, 보다 깊은 기쁨을 갈망합니다. 교회는 사랑과 기쁨을 세상에 보여주는 창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변화되고, 변화된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16세기,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교부 도로테우스는 세계를 원으로 상상해 보라고 제안했습니다. 그 중심은 하나님이시고 그분의 광채는 인간들의 각기 다른 삶의 모습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모든 이가 하나님이 계신 원의 중심으로 다가간다면 그들은 서로에게 다가가는 동시에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로마의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이례적입니다. 로마서를 이례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바울이 로마에 교회를 세운 일이 없으며, 이전에 그곳에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로마 방문을 원했고 그곳을 기지 삼아 스페인에 가서 복음을 전파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 교회는 사도 바울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을 통해 그리스도를 소개받은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이 로마로 이주하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로마 교회에는 바울과 친분이 있는 지체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는 기독교 공동체가 누리는 기쁨을 심화시켜 주고 자신에 대한 로마 그리스도인들의 신임을 공고히 함으로써, 사역 확장 계획이 좀 더 용이해지기를 원했습니다.

로마서를 개괄하면, '그러므로'의 중요성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1장은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기쁨의 교리적 토대를 보여 주고, 나머지 다섯 장은 기쁨의 삶이 초래하는 결과들을 묘사합니다. 따라서 로마서 12:1의 '그러므로'가 로마서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연결 짓는 경첩임을 알 수 있습니다.

* 1:1-17 복음의 기쁨에 대한 요약.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 1:18-32 잘못을 범하는 인류를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시는" 불가피성
* 2장 순종의 행위를 통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을 포함해 진리를 거부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 3:1-20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인류 전체의 반역
* 3:21-31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의
* 4장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은 아브라함의 예
* 5:1-11 소망 중에, 고통 중에, 하나님 안에서 행하는 올바른 자랑/기쁨
* 5:12-21 죽음을 얻게 한 아담과 생명을 얻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비교
* 6장 자신의 죄에 대해 죽는 것과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서서 기쁨으로 부활케 하는 것으로서의 세례의 중요성
* 7장 율법의 위협에 대한 죽음과 실패에 대한 끝없는 투쟁
* 8장 성령을 통한 자유와 생명과 기쁨, 그리고 하나님의 광대하신 사랑
* 9장 하나님의 주권과 유대인들의 불신앙
* 10장 말씀과 전파를 통한 믿음과 이스라엘의 거부
* 11장 이스라엘의 남은 자. 이방인들의 접붙임, 유대인들을 위한 구원의 희망, 그리고 환희의 송영

* 12:1 그러므로

* 12장 서로를 철저히 사랑하는 기쁨에 찬 공동체가 되는 길
* 13장 권위에 대한 순종의 중요성과 사랑으로 돌보는 방법
* 14장 약한 자와 강한 자 모두를 사랑으로 돌보는 방법
* 15장 소망과 기쁨 같은 하나님의 성품을 선물로 받기. 이방인들 특히 스페인에서 말씀을 전파하기를 원하는 바울의 갈망
* 16장 자신의 친구들을 향한 바울의 격려와 인사, 가정교회들의 연합을 위해 애쓸 것에 대한 권고

12:1의 "그러므로"에 이어지는 각 장의 중심주제를 살펴보면 사도 바울이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얼마나 강조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기쁨을 바탕으로 표현되는 사랑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결핍 현상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랑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그런 사랑을 창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야 합니다. 믿음을 통해 율법주의로부터 해방될 때 생겨나는 능력을 경험해야 합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해야 합니다.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경험들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으로 인해 우리 마음에 감사와 기쁨이 넘쳐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을 "그러므로"와 연결시킬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1장부터 11장까지 편지를 쓰는 동안 깊이 감동한 바울은 11장 말미에 이사야 40:13과 욥기 41:11을 인용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3-36).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와 경륜에 감탄한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입니다. 11장까지의 모든 내용, 우리에게 힘을 주는 확증, 우리를 고무시키는 권고, 우리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자비, 우리를 매혹시키는 사상, 우리를 압도하는 실재, 우리를 지탱하는 소망,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사랑, 하나님 사랑의 품에 안겨 있다는 기쁨을 느끼지 않고서는 12장을 읽을 수 없습니다. 참 의미를 전달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한 마디에 이처럼 엄청난 깨달음과 기쁨과 주님을 향한 사랑과 온전한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지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라는 구절까지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헌신에 대한 갈망을 한층 북돋아줍니다. 자비나 연민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드물게 등장합니다. 이 단어는 거의 예외 없이 복수형인데, 이것은 하나님 자비의 추상적 개념이 온갖 종류의 구체적 형태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은 자비에 대해 생각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의 자비는 분명하게 경험될 수 있는 그 무엇입니다. 그 경험은 우리를 기쁨으로 넘치게 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그러므로"라는 단어에 들어 있는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데, 아직 확신이 없는데, 아직 부족한데,' 이런 생각이 든다면 여러분은 이미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무언가를 알고 있고, 확신이 있고,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직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자신의 부족을 깨달은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자신의 부족을 알기에 날마다 주님을 바라보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집중하는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그러므로"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기쁨의 공동체를 이룰 때, 그 기쁨을 보고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기꺼이 공동체에 들어와 주님을 알게 되고 그들 역시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것, 이것이 복음 전파요, 선교요,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주님의 길을 기쁨으로 걸어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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