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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
최태선 목사  |  어지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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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7.16  03:5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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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로마서 12:1).

구별된 제물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되어야 할 우리는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합니다.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할 뿐 아니라 최선의 상태에서 드려져야 합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길 원한다면 제물로서의 우리 몸을 잘 보존하고 순결함을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릴 때, 우리는 온전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앞부분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거스르는 불순종에 대해 죽을 때에만 새로운 삶을 살아갈 자유를 얻게 된다고 역설했습니다.

또한 기독교 공동체가 힘을 얻으려면, 현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악의 정사와 권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우리가 드리려는 몸을 훼손시키려 달려들고 있습니다. 이기심과 권력욕에 대한 유혹은 우리의 기쁨을 파괴할 뿐 아니라, 이웃을 위해 봉사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진정한 관계가 주는 기쁨도 빼앗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는 기도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신실하신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십니다. 우리의 능력을 의지할 때, 우리의 자비심은 얼마 안 가 소진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그분이 의도하시는 교회가 되지 못하면, 우리의 몸을 제물로 드릴 수 없습니다. 마틴 루터가 말한 것처럼 '악마와 세상과 육신'은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훼손시키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때때로 주변 문화의 얼굴을 하고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거나 성취와 성공에 대한 유혹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그 실체를 파악하지도 못하고 넘어지는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미리 마음의 준비를 시키고 있습니다. 7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벌어지는 전투, 즉 우리의 왜곡된 욕망과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힌 경건한 삶 사이에서 벌어지는 끝없는 전쟁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늘 성도처럼 행동하지 않는데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도라고 선언하셨기에 우리는 성도입니다. 그러나 종말에 불멸의 새로운 몸을 입기 전까지,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성향은 우리를 계속 괴롭힐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우리는 인간적인 한계 안에서 탄식할 것입니다. 로마서 12:1에서 사용된 몸이라는 단어 '쏘마'는 다른 곳에서 육체라는 의미로 사용된 '싸륵스'와 동일한 개념이 아닙니다. '싸륵스'는 '육신'(flesh), 즉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인간의 욕망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 '싸륵스' 때문에 우리는 몸을 온전히 드리지 못하고 불순종합니다. 우리는 이 '싸륵스'의 온갖 유혹들과 끊임없는 전투를 벌입니다. 끊임없는 전투에 대한 절망 가운데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하고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 감사의 말이 나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4-25).

감사하고는 있지만 그는 여전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무엇에 대해 감사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8장 1절에서 그 이유가 밝혀집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8: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용서를 이루셨기에, 하나님의 시각에서 우리는 '성도'로 만들어졌기에, 우리의 인격이 죄에 물들어 있어도 우리에게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실패했더라도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의 용서가 새로운 희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객관적으로 우리가 드리는 제물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삶도 거룩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예배로 응답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그 부족한 예배를 합당하고 거룩한 것으로 받아 주십니다.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정죄함을 없애 주실 때, 우리의 예배는 그분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진정으로 한 몸이 되지 못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용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시기에, 우리는 공동체의 몸을 드리는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며, 서로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베풂으로써 우리의 몸을 정결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제물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거룩한 산 제물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바울은 단 한 번의 결정적 행동(once for all)을 뜻하는 동사를 사용하여 우리의 몸을 '드리라'고 한 다음, 그 드림의 마땅한 모습이 되어야 할 세 개의 형용사를 덧붙였습니다. '산', '거룩한'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이 그것입니다. 그 같은 제물이 바로 영적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산'

‘산’ 제물은 언제든 제단에서 기어 나오고 싶어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고전 9:27) 하는 치열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개인으로든 공동체로든 자신의 몸을 확실하게 드리라고 권고하는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몸이라는 단어의 공동체적 의미가 강조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수많은 종파와 교단들로 갈라져 있습니다. 그것들을 허물고 하나 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사소한 교리 차이도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공동체들마다 다양하고 독특한 정체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산 제물이 되기 위해 종파를 허물고 교단을 허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몸들을 함께 드리는 것입니다.

기독 교회들이 자기만 내세우지 않고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임을 인식하고,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최우선의 가치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몸(모든 교회들로 이루어진)을 '산' 제물로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거룩'

우리가 드리는 몸이라는 제물은 거룩합니다. 거룩이라는 단어는 이 시대에 힘을 잃었지만, 거룩은 성경에서 풍부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성막이나 성전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특정한 그릇들을 따로 구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그릇들은 거룩한 쓰임을 위해 성별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 역시 그분의 목적을 위해 구별된 특별한 그릇들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거룩하다고 여기는 순간, 우리는 교만이라는 덫에 걸리게 됩니다. 무엇보다 사랑과 기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절망으로 내몰기 위해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사랑하는 형제인 우리들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받아 주시는 은혜의 기쁨 속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릴 때 우리를 거룩한 존재로 구별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삶을 통해 그분의 거룩함을 드러내기를 더욱 갈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지막으로 우리의 몸이라는 제물은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 삶의 의미를 부여받습니다. 존재 자체가 그분께 기쁨이 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진정으로 깨달으면, 우리는 먼저 그분의 나라와 뜻을 구하는 삶을 기꺼이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존재 자체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일들을 자유함 가운데 행하게 됩니다. 우리의 사랑을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감사로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 그분을 향한 사랑을 담을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기쁨에 넘치는 모험입니다.

영적 예배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때, 그것은 영적 예배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영적 예배라는 말로 그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해줍니다. 예배에 사용된 헬라어 명사는 종종 '섬김'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의식'과 '의무'라는 뜻 모두를 내포합니다. 이 단어의 이중적 의미는 유익한 역할을 합니다. 예배의식과 봉사활동이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찬양과 행동 모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영적’이라 번역된 헬라어 형용사 '로기코스'는 ‘로고스’에서 파생된 형용사이기 때문에 어떤 역본들은 '지성과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몸을 인격적으로 해석하면, '영적 예배'는 모든 차원의 삶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성(聖)과 속(俗)의 경계가 사라집니다. 모든 직업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됩니다. 작업장은 예배 장소가 되며, 일상적인 활동 역시 예배의 일부분이 됩니다.

예배에 대한 이러한 통전적인 이해를 통해 교회는 참된 영성을 회복하게 됩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복음을 보여 준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섬김의 자리로 부르셨든, 최선을 다해 그 일을 할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다가갈 것입니다. 더욱 강력한 결속으로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이나 공동체를 영적 예배로 하나님께 드릴 때, 그분은 유혹들을 거룩과 용납의 순간들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때, 우리는 더 깊은 진리의 세계로 초대되어 참된 공동체의 길을 기쁨으로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참 자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멍에는 쉽고 주님의 짐은 가볍습니다(마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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