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립 40주년을 맞은 D 교회 성도님들께 먼저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D 시에서 가장 좋은 교회,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은 교회라는 뜻의 D 교회가 설립된 지도 벌써 40년이 되었네요. 돌이켜보면 저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D 교회가 현재의 자리에 건축하기 전, 근처 상가 공간을 빌려 예배를 드릴 때부터 부모님의 손을 잡고 D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초등부와 중고등부를 거쳐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신앙생활을 했던 곳이자, 실제로 제 신앙의 토대를 쌓은 곳이니 D 교회는 저에게 모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D 교회하면 생각나는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원로 목사님이 되신 담임목사님의 주님을 향한 열정과 성도들을 향한 사랑은 물론이요, 중고등부 시절 여름방학이면 가곤 했던 수련회가 그것입니다. 수련회가 생각나고 그리워지는 것은 물론 당시 받은 은혜가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수련회 마지막 날, 결단의 시간에 주의 종이 되겠다고 헌신했던 형, 누나, 동생들 대부분이 목회자, 선교사, 사모가 되었을 정도로 그때 받았던 은혜는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그 자리에 계셨고, 또 우리의 작은 결단이나 서원을 결코 허투루 여기지 않으시는구나 하는 경외감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수련회가 생각나는 것은 저희를 섬겨 주신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의 사랑 때문입니다. 권사님, 집사님들은 임시로 만든 식당에서 굵은 땀을 흘리며 국을 끓이고, 저녁이 되면 시원한 수박을 잘라서 저녁 집회가 끝난 저희를 대접해 주셨습니다. 또 장로님들은 저녁에 퇴근하시고 난 뒤, 음료수나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한 시간 이상 운전하여 저희를 찾아와 격려해 주셨지요.

어느덧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제가 그분들 나이가 되고 보니 누렸던 섬김과 사랑이 더 귀하게 생각됩니다. 한편으로 나는 과연 받은 사랑을 다음 세대에게 제대로 전해주고 있나 하는 부끄러운 생각도 듭니다. 지금은 모두 은퇴하시고, 몸도 예전 같지 않아 흰머리 가득하신 분들이 많지만, 가끔 한국에 갈 때면 “미국 사람 왔다” 하시고, 이름을 부르며 저의 가족 모두를 반겨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주일 예배는 물론이요, 저녁예배며, 새벽예배 때마다 자리를 지키고, 교회나 나라를 위해 기도하시는 모습이 참으로 존경스럽고 귀하게 여겨집니다.

철야기도회 생각도 많이 납니다. 방학이 되면 금요일 밤마다 지하 기도실에 모여, 나무 바닥에 방석 하나씩 깔고,  땀을 뻘뻘 흘리며 찬양하고 기도했지요. 그때는 지금처럼 에어컨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고, 더위로 둘째 가라면 서러운 D 시의 더위를 식힐 냉방시설이라고는 선풍기가 전부였기에, 지하 기도실은 기도의 열기로 가득했습니다. 그때는 특히 저 같은 중고등부 학생들의 신앙 열기도 대단해 모두 방언을 받고 기도하며 밤을 새웠던 것 같습니다.

D 교회는 그 지역의 ‘영적인 오아시스’라고 생각합니다. 오래 전부터 가까운 곳에 공단지역이 형성되어, 그곳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이 많고, 또 외부에서 오는 바이어나 손님이 많아서인지, 교회가 자리한 P 동에는 유독 유흥업소와 시설이 많지요. 어디서 본 자료에 따르면 D 시에서 유흥업소가 가장 많은 지역이 P 동이라고 하더군요. 빨간색 네온사인들이 번쩍이는 가운데, 같은 색깔의 교회 십자가가 늦은 밤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오라, 오라 어서 오라”하고 외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D 교회가 사막 한가운데 있는 오아시스처럼 생각되곤 합니다. 

D 교회가 그립고, D 교회를 섬기는 성도님들이 부럽습니다. 어렸을 때에는 더 큰 곳으로 떠나고 싶었지만, 한 교회를 평생 섬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새삼 깨닫습니다. 이제 40주년을 맞이했지만 앞으로 100년, 아닌 주님 오실 때까지 D 시의 영혼을 밝히는 귀한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 그리고 성도님들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jungdy182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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