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절제를 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휴식이라 말해"

 

일요일 밤 디스커버리 채널의 ‘상어 주간(Shark Week)’ 서른한 번째 시즌이 시작되었다. 이 프로는 현재 세계 72개국에서 방영되고 있으며, 3,500만 명 가까운 시청자들이 이 프로를 볼 것으로 예상된다. 이 프로의 매력은 무얼까?

‘상어 주간’은 원래 상어들에 관한 미신을 깨뜨리고 상어 보존의 중요성을 환기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영화 <조스>가 흥행에 성공한 뒤 이 시리즈가 시작되었다. 중서부 지역 인구 절반이 상어를 “절대적으로 무서워한다.”는 생각이 들면, 상어들이 우리의 집단 무의식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오늘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상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들을 한 주 내내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되는 그 방식에 대한 것이다. 즉 나태함에 대한 것이다.

나태(slothfulness) 하면, 우선 넷플릭스를 몰아서 보거나 소셜 미디어를 끝없이 보는 일과 연관된 게으름(laziness)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500년대에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칠죄종에 포함시킨 나태(slothfulness)는 게으름(laziness)보다 의미가 더 깊다. 기독교 역사에서 나태는 일종의 무관심과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우울과 연관된 죄로 여겨졌다.

그 결과, 나태(slothfulness)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겐 나태가 일해야 할 시간에 페이스북에서 눈을 떼지 않는 것처럼 단순할지 모른다. 또 어떤 이들에겐 식탁에서 가족과 이야기하지 않고 TV만 구경하는 행위로 나타날 수 있다.

일 중독자도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오직 일밖에 모른다면 나태의 죄를 저지르는 것일 수 있다. 그들은 아마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잔업을 한다는 핑계를 댈지 모른다. 그러나 배우자와의 대화나 자녀 숙제 봐주는 일보다 쉬워서 일을 선택하는 이들도 상당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나태하지 않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매순간 목적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두 가지 질문을 해본다. 현재의 내 행위(혹은 무행위)가 목적을 수행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 목적은 선한가? 악한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우리 삶의 모든 면, 모든 순간을 위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 우리가 나태의 죄를 짓고 싶지 않다면, 휴식이든 일이든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매순간을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신자들에게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말했다(빌 3:13-14).

사도 바울이 쉬어본 적 없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쉴 때에도 바울은 자신의 시간과 행동을 이끄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활짝 열고 있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며, 나태의 유혹을 이기는 방법이다.

“사람들은 거룩함을 향해 움직이지 않는다. 은혜에서 비롯된 노력 없이 사람들은 경건, 기도, 성경 말씀에의 복종, 주님 안에서의 기쁨에 끌리지 않는다. 우리는 타협을 향하면서 그것을 관용이라 부른다. 불복종을 향하면서 그것을 자유라 부른다. 미신을 향하면서 그것을 신앙이라 부른다. 자기 절제를 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휴식이라 부른다. 기도를 하지 않으면서 율법주의에서 벗어났다고 자식을 속인다. 신은 없다면서 해방되었다고 자신을 설득한다.”라고 D. A. 카슨은 말했다.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상어를 구경하든, 페이스북을 보든, 일거리를 생각하든, 그 시간과 행위를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매 순간 하나님의 개입을 구하라. 주님이 하실 수 있는 일에 놀라게 될 것이다.

(* 편집자 주 : 문화사역자 짐 데니슨 박사의 7월 29일 칼럼 발췌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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