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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과 고난 가운데서도”
박찬효  |  약물학 박사,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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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7.31  23: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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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길에서 아픔과 시련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이 문제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인생의 대명제이며, 수수께끼같이 풀기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나 자신과 주위 사람들의 고난은 이 문제를 자주 생각하게 하는데, 요즈음 이 주제에 관한 필립 얀시의 책들을 읽고 느낀 바가 많다.

신체적 통증에 관해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 몸에는 쾌감을 인지하는 촉감세포(센서)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손가락 끝으로 거친 표면이나 날카롭고 뾰족한 것을 만질 때에는 불쾌감이나 아픔을 감지하지만, 같은 손가락으로 비단이나 어린 아이의 부드러운 살갗을 만질 때 느끼는 좋은 감각은 그런 감각을 느끼게 하는 센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불쾌감, 통증을 못 느낄 때 느껴지는 감각이란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아픔을 가져다 주는 시련과 고난이 없다면, 과연 우리가 쾌감과 만족감,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까? 힘들게 땀 흘려 일한 후에 누리는 휴식은 달콤하고 만족스럽지만, 항상 휴식하고 있다면, 지루함이나 나태에서 오는 권태감이나 불편함을 느낄 뿐이고, 그런 휴식은 진정한 의미의 휴식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통증과 고난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혹자는 창조주의 실수라고까지 이야기하지만, 가장 보편적인 대답은 통증이 몸의 이상을 알리는 신호이기 때문에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병환자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므로 신체의 일부가 상해도 그것을 감지할 수 없다고 한다. 통증이 없다면, 뜨거운 물체나 날카로운 물체에 손을 다쳐도 우리는 위험을 감지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통증은 몸의 이상을 알리는 경고성 신호등으로 볼 수 있다.

또 한 가지, 아픔을 수반하는 시련과 고난은 그것이 육체적이던, 정신적이던, 영적이던, 왜 존재하며 그 의미는 무엇일까? 성경적으로 보면 인간이 당하는 고난은 죄에 대한 징벌, 보다 나은 영성을 위한 훈련, 악한 세력의 영향, 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애매한 것 들(자연 재해, 뜻하지 않은 사고 등)로 분류되는 것 같다. 혹자는 하나님이 “완전 선”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에게 고통과 고난이 많다고 주장하며, 또 다른 이들은 “완전 선”이라도 그것을 인생에게 온전히 베풀 능력이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성경의 인물 “욥”의 경우처럼 사탄의 음해를 허락하신 것에 대해 심한 반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으며, 심지어 창조주가 인간에게 너무 많은 “자유 의지”를 허락하여 인간들의 방종으로 인해 온갖 비극이 생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반면, 시련과 고통은 창조주가 우리에게 경고하는 “확성기”이므로 꼭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세상이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타락하여, 인간뿐 아니라 자연까지 고통하며 신음하고 있다는 것이다. 약속된 온전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오기까지 우리의 고통은 숙명적이다.

따라서 우리가 당하는 시련과 고통, 특히 그것이 자연재해나, 불의의 사고, 불치병 등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 것일 때에는 그 원인을 묻기보다는 시련과 고통 가운데에서 어떻게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을까를 고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삼중 장애를 가진 “승욱”이의 어머니는 『굿모닝 엔젤』이란 책에서, 처음에는 시련이 못마땅하여 불평하고 심히 불행하다고 느꼈지만, 차차 믿음이 자라남에 따라 다른 가정에도 장애아가 태어나는데, 왜 나에게는 장애아가 태어나면 안되는가로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그 후부터 그녀는 승욱이를 키우기에 가장 적합한 어머니라고 여기셔서 하나님이 그녀에게 승욱이를 주셨다고 믿게 되면서, 승욱이가 더 없이 사랑스럽다며, 아이 덕분에 경험한 사랑과 행복을 책을 통해 간증했다.

27년 전에 불의의 자동차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S 형제는 안경에 부착한 센서로 컴퓨터를 작동시켜 책을 두 권이나 냈으며, 온라인 공부로 문학학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신학대학원 공부를 하고 있다. 비록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지만, 구원을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갖은 역경과 고난 가운데서도 참 소망을 붙들고 주위 사람들에게 믿음의 본질과 능력을 보여 주고 있다.

위에 들은 사례 말고도 비슷한 예는 수없이 많다. 닥쳐온 아픔과 고난 때문에 원망하고 절망하며 남은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그 가운데에서 긍정적, 생산적인 마음가짐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 격려와 도전과 영감을 불어 넣는 삶을 살 것인가? 선택은 자유의지를 소유한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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