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이 ‘비록’의 연속일지라도 높은 곳에서 ‘만족’의 노래를 불러야 할 것이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하박국 3:17-19)

유대 전통 하디시즘에는 슬픔의 나무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사람이 죽으면 누구나 하늘나라에 있는 슬픔의 나무 밑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 나뭇가지에다 세상에서 겪은 고통과 불행을 걸어 놓는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천천히 나무 주위를 돌면서 자신이 나뭇가지에 건 것보다 덜 불행하고 덜 고통스러워 보이는 인생이 있으면 그것을 자신의 것과 바꿔도 된다고 한다. 그러나 누구든지 결국에는 자신의 불행과 고통을 선택하게 된다고 한다. 또한 한결 더 지혜로워져서 슬픔의 나무 밑을 떠난다는 것이다.

인생이 힘들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보기에 세상의 모든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삶은 불공평하다. 세상의 불공평에 대해 우리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사랑과 권능의 하나님께서 원칙에 따라 역사하시기를 기대한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3-14).

미르나 알렉산더는 성경공부 교재 『당신의 하나님을 보라』에서 이 구절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인생의 굴곡에는 ‘하나님이 야기하신’ 인생의 굴곡과 ‘우리가 스스로 만들고 하나님이 허용하신’ 인생의 굴곡이 있다는 것이다.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모든 인생의 굴곡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세상의 불합리성에 대하여 강력하게 질문을 던진 사람은 아마도 하박국 선지자일 것이다. 하박국은 자기 민족이나 다른 민족에게 메시지를 전했던 구약의 다른 선지자들과는 달리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구부러진 상황에 처한 사람이었다. 경건한 왕이었던 요시야가 죽은 후, 유대 민족은 거짓 신들을 경배했고, 여호와를 거의 경배하지 않았다. 도덕적 부패가 유다에 만연했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폭력과 불법이 날뛰었지만 하나님은 상관하지 않으시는 듯했다. 하나님은 일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였다. 하박국은 하나님 앞에 나와 “언제까지이니까? 왜, 하나님, 어찌하여 간악과 패역이 유다에 지속되도록 허용하십니까?” 라고 부르짖으며 기도하였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합 1:2-4).

하박국의 질문에 대해 하나님은 하박국이 믿지 않을 일을 하실 것이라고 대답하셨다.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들을 일으켰나니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심판과 위령이 자기로 말미암으며”(1:6-7).

하박국은 충격에 빠졌다. 하나님의 대답은 더 큰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유다는 벌을 받아 마땅했지만, ‘왜 하나님은 갈대아 사람들을 보내어 유다를 벌하시는 걸까?’ 갈대아 사람은 유다 사람보다 훨씬 더 사악하고 무자비하지 않던가?

갈대아인에 대한 평판은 큰 좌절감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하박국 1:6-11을 보면, 그들은 사납고 성급하며 남에게 속한 물건을 포획했다. 그들은 두려운 존재였다. 그들은 열왕을 멸시했고 모든 견고한 성을 비웃었으며 그 힘으로 자기 신을 삼았다. 하박국은 통곡하는 대신에 “그것은 공의롭지 못합니다.”라고 하나님의 성품인 거룩함과 순결함에 호소했으며, ‘왜’라고 물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하신 자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1:12-13).

하박국은 질문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2:1) 그는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2-4).

하나님은 하박국이 들은 내용이 참되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해 주셨다. 갈대아인들은 올 것이다.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냥 믿음으로 살라는 것이다. 신약에도 세 번 기록된(롬 1:17, 갈 3:11, 히 10:38)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왜’에 대해 설명해 주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그 대신 하나님은 ‘왜’를 묻고 싶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를 좌절하게 만든다. 우리는 '왜‘에 대한 답을 듣길 원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스스로를 설명하실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이 ’왜‘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시면, 대답을 얻기 위해 천국에 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하박국은 이것을 깨달았다. 비록 원하던 답을 못 얻었지만, 하박국은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확인했다.

하지만 두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말씀대로 따르기로 결심하였지만 상황은 그를 두렵게 하였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열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3:16).

뼈가 썩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고통은 심했다. 그의 몸은 떨고 있었다. 하박국의 이 모습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의 주인공 하박국 선지자가 다가오는 파멸의 상황에 대해 떨고 있는 모습은 우리에게 자신감을 불어넣는다. 하박국은 떨고 있는 상황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믿음의 선언을 하였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3:17-19).

참으로 놀라운 믿음의 선언이다. 아무리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될지라도 그분이 보호하시고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다. 최악의 환경 속에서도 최고로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의 의미를 이보다 더 분명하게 보여 주는 구절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박국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의심의 울음 속에서 믿음의 노래로 옮겨지게 되었을까? 첫째, 그는 하나님께 정직하게 자신의 의심을 말했다. 둘째, 그는 하나님을 기다리기로 결심했다. 셋째, 그는 하나님을 만났다. 넷째,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결단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를 말해 주지 않으신다. 이 세상에서는 사건들이 왜 그런 식으로 발생했는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대답은 하박국에게 주신 대답이다. “오직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우리는 볼 수 없는 때에도 믿어야 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 말이 안 되는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을 꼭 잡고 하나님과 함께 어둠 속을 걸어야 한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하박국이 걸었던 그 길을 걸었다. 노아가 그랬다. 비 한 방울 내린 적 없었던 때에 산중턱에서 백 년 동안 배 같지 않은 배를 만들었다. 아브라함이 그랬다. 좋은 환경을 버리고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그는 믿음으로 길을 떠났다. 100세에 얻은 아들인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모리아 산을 향해 길을 떠났다. 모세도 그랬다. 모든 영화를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길을 걸었다. 다윗이 그랬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십여 년을 광야에서 방황했다. 그 시기에도 다윗은 하나님을 노래했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다니엘의 세 친구가 그랬다.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는 그 길을 걸었다. 신약의 제자들도, 사도 바울도 그리고 예수님 자신도 그 길을 걸었다.

삶에는 반드시 번영의 때와 역경의 때가 있다. 곧은 때와 구부러진 때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볼 수 없고 그분을 바라보아야만 할 때에도 믿음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신뢰한다.”고 말해야 한다. 비록, 비록, 비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박국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

중국 동부의 한 농부가 대나무를 심고 기다렸다. 첫 해에는 아무 것도 올라오지 않았다. 두 번째 해에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세 번째 해, 네 번째 해에도 마찬가지였다. 다섯 번째 해가 되었을 때 땅 밑에 대나무 뿌리가 빽빽이 퍼져 있었으며, 마침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대나무 싹들이 지면을 뚫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치 마술을 보는 것 같았다. 대나무들은 하루에 한 자가 넘게 자랐다. 불과 여섯 주 만에 대나무들은 15미터 넘게 키가 커졌다. 농부는 대나무들을 팔아 큰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의 삶이란 바로 이런 이야기가 아닐까? 우리의 삶이 ‘비록’의 연속일지라도 어둠의 골짜기를 넘어 높은 곳에서 ‘만족’의 노래를 불러야 할 것이다. 하박국의 노래는 높은 곳에서 부르는 ‘만족’의 노래이다. 힘들고 어려운 인생길에서 ‘비록’의 골짜기를 지나 높은 곳에서 ‘만족’의 노래를 부를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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