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th in Boaz's Field by Julius Schnorr von

룻기는 평범한 이민자들을 위한 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런지 한 번 살펴 볼까요?

룻은 모압 여자입니다. 근친상간으로 이어진 계보 속에서 태어난 자이기도 하고, 인간을 번제로 제사 드리는 이방신을 섬기는 족속에 속했던 자이기도 합니다. 이런 모압 족속에 속했던 여인이 성경에 다윗의 조상으로 기록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룻의 등장은 하나님께서 붙드시면 누구든지 어떤 종족이든지 대단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복음의 포괄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룻기는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폭력적이고 어두운 분위기의 사사기 바로 다음에, 그리고 서로 왕이 되려고 갈등하는 사무엘서 사이에 끼어 있는 책이면서, 그 사이에서 평온과 안식을 주는 서정적인 책이 바로 룻기입니다. 이는 곧 어두운 시대에 성도 간에 어떻게 따뜻한 관계를 이루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교회공동체 모형의 제시이기도 합니다.

룻기의 앞부분은 모두 죽는다는 이야기뿐입니다. 그런데 끝에는 다윗의 탄생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를 이민사회와 연결해 보면 1세들의 고난 많은 삶이 2세, 3세로 이어지면서, 희망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은 이민자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특성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룻기가 강조하는 하나님의 특성은 은밀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데에는 세 가지 요소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방법을 깨닫는 것과 하나님의 때를 아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의 뜻과 방법을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때, 이걸 아는 게 가장 어렵습니다. 흔히 하나님의 역사는 필연적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유독 ‘우연히’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룻은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서술합니다. ‘마침’ 그 시각에 보아스가 밭에 나와 룻을 발견하고 룻의 기업 무를 자에 대한 요청을 듣고자 하였을 때, 또 ‘마침’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갔다고 서술합니다. 그런데 ‘우연’과 ‘마침’이란 단어로 연결된 이 모든 사건이 실제로 다 우연에 의한 것이었을까요? 물론 아니지요. 그렇다면 왜 이 책에서 ‘우연’이란 단어가 이렇게 많이 나오는 걸까요? 아마도 이 책의 저자는 ‘우연’이라는 단어를 빌어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이 안 보이는 것 같은 때일지라도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비틀어 보여 주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혹시 이런 생각을 하실 때가 있는지요? 일상적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살다 보면 이런 회의가 들 때가 분명 있습니다. 룻기의 저자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또렷하게 느껴지지 않고, 우연처럼 느껴지는 바로 그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룻은 시어머니께 헤세드를 실천하고, 보아스 역시 나오미와 룻에게 헤세드를 베풀고, 이렇게 서로에게 헤세드를 베푸는 일이 이어지면서 다윗이라는 왕이 탄생하게 되는 거지요. 이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나가고 있는 그 현장에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헤세드를 실천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룻기를 읽을 때 유의할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혹자는 엘리멜렉이 모압으로 간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아무리 흉년이 들어도 가지 말았어야 한다고 해석합니다. 이는 바른 해석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저는 1975년, 중학생이었을 때 캐나다로 이민 갔습니다. 경제적 안정을 찾기 위해 가족 이민을 간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 봅시다. 가정 형편상 혹은 다른 이유 때문에 이민을 떠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계획에 반대하여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일까요? 만약 엘리멜렉이 모압으로 이주하지 않았다면, 룻이 어떻게 이스라엘 족보에 올라갈 수 있었을까요? 그러니 다른 나라로 이주한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오미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려 할 때, 룻과 함께 오르바라는 며느리가 나옵니다. 나오미는 너희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고 나를 따라오지 말라고 세 번이나 간곡히 권하지만, 룻은 그래도 어머니를 따라가고, 오르바는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여기서 오르바를 나쁜 여자라고 너무 폄하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사람은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룻이 자기 족속,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즉 옛 종교를 버리고 어머니의 하나님을 따르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헤세드를 경험했는데, 자기 집으로 돌아가면 하나님을 포기해야 하니까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입니다.

혹여 내가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또한 그러한 힘든 일상적인 삶 속에서라도 하나님의 손길과 음성을 느끼며 사랑이 많은 공동체를 지향하자는 것이 바로 이 룻기의 주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민자로 살아가는 성도님들, 평범한 일상을 견뎌내는 데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필요합니다. 꾸준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서로의 소망이 되고 헤세드를 실천하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 편집자 주 : 지난 2월, 시카고 북부에 위치한 헤브론 교회에서 열린 <룻기 세미나> 내용을 신정순 작가가 간추렸다. 참고로, 구약성경에 많이 등장하는 히브리어 ‘헤세드’는 사랑, 자비, 긍휼, 선함 등으로 번역된다. ‘헤세드’는 ‘자비’라는 추상적인 의미로 잘 알려져 있지만, 본래 ‘구체적인 상호의무’를 뜻하는 말이었다. 따라서 언약에 기초한 확고부동한 사랑으로 정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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