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한복음 15:1-6).

이 비유에서 포도나무는 예수님 자신이며 우리는 그분의 가지입니다. 가지인 우리는 포도나무이신 그분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과실을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고는 본래 창조된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단순히 믿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내주하는 삶을 살기 위해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비유가 주는 세 가지 중요한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교훈은 친밀한 연결입니다.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습니다. 무게를 못 느낄 정도로 단단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님과의 관계에서 긴밀한 연결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하지만 주님과의 간격이 벌어지도록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을 때 주님과 우리 사이에 간격이 존재합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도 간격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5).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을 때, 주님과 우리 사이에 간격이 생깁니다.

우리가 다른 성도를 실족케 하고 이 문제를 올바로 해결하지 않을 때에도 주님과 우리 사이에 간격이 존재하게 됩니다.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4).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우리를 하나 되게 합니다. 그것을 깨는 것은 우리의 잘못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가 분열되고 마음이 나뉘는 것은 주님과 우리 사이에 간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연결을 더욱 강하게 해주는 것은 기도와 말씀 묵상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두 번째 교훈은 열매 맺기입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생존을 위해 전적으로 포도나무에 의지합니다.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는 가지에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가지들이 만들어내는 선한 것들은 포도나무에 생명을 주는 수액을 빨아들인 결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부이신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는 삶을 유지하셨습니다(요 5:19). 그분은 영적인 생명을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모범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 말씀은 조금도 과장된 표현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의 육체는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성취해 보려고 합니다. 대개 능력 있다고 여기는 분야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달성해 보려고 합니다. 지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은 지적인 능력으로, 돈이나 권세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사용해서 무엇인가를 이루고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육체의 그 무엇도 은혜에 대한 간절한 필요를 줄이지 못합니다.

경건한 그리스도인 가정이라면 인생의 바른 길을 가르치고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의존이 생략된 것이라면 그것은 개선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육체는 기독교적 문화의 이름으로 형성된 것은 무엇이든지 수용할 수 있으며, 비도덕적인 일에 대해 혐오감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본질적인 역할을 차지하는 그러한 선을 육체에 불어넣을 수 없습니다.

연단과 의지력이 성령의 열매인 절제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육체에서 비롯된 인격적인 연단이나 의지력은 엄격하고 관계적으로 냉담하며 무언가를 달성해도 독선적인 반면에, 성령의 열매로 말미암은 절제에는 여유가 있으며 관계 면에서 서로를 가깝게 하고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에 대해 겸손한 마음으로 기뻐합니다.

인격적인 장점도 때로 성령의 열매로 오인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매력이나 동정심은 사랑의 모조품이 될 수 있습니다. 쾌활함이 기쁨으로 오인될 수 있습니다. 단호한 성격이 평안으로 오인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 교육과 목회 훈련도 우리를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의존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보다는 이런 것들을 의지하는 것이 훨씬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기독교적인 훈련 프로그램들도 목회에 유용한 도구들을 제공해 줄 수 있지만, 목회를 위한 활력을 제공해 줄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 5:21). 생명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는 생명의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람들을 살리고 회복시켜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열매는 사람을 세우고 살릴 수 없습니다. 믿음은 이 사실을 깨닫는 과정일지 모릅니다.

세 번째 교훈은 성령 충만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이렇게도 묘사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성령의 통제에 굴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 충만해야 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첫 번째 교훈에서 살펴본 친밀한 연결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주 안에 내주함으로써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새로운 능력을 프란시스 쉐퍼 박사는 적극적인 수동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적극적이라는 말과 수동적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지만, 그것이 내주의 핵심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입니다. 우리 쪽에서도 최선을 다하지만 우리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힘과 능력이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감당하기 위해 수동적이며 끈질긴 순종이 따라야 합니다.

내주의 본질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맺을 수 없는 열매를 맺는 분의 생명과 온전히 협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경건한 성품, 즉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가장 위대한 증거입니다.

포도나무에서 수액을 힘차게 공급받으면서 맺는 열매는 생명의 역사입니다. 사람을 일으키고 회복시키며 살리는 놀라운 기적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그 역사에 부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포도나무에 단단히 붙어 있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공급하시는 놀라운 권능으로부터 일어나는 주님의 일에 전적으로 의탁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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