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의 건국 이념인 자유 민주주의 및 시장 경제의 기간이 흔들리고, 조국의 방위와 번영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해 온 한미 동맹에 균열이 생기는 듯한 요즈음,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은 열사들이 남긴 가슴 시린 역사의 현장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이들의 숭고한 피 위에 세워진 자랑스러운 조국이 겪고 있는 가슴 아픈 현실로 인해, 나의 가슴은 더욱 더 처절하고 이분들에게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작년 가을에 유럽의 몇 나라들을 둘러 보다가, 늘 마음에 품고 있었던 “이준 열사 기념관”을 찾아 보았다. 헤이그에서 1907년에 열렸던 현대 평화 회의의 효시인 “만국 평화 회의”(정확히 제2차 헤이그 평화 회의)에, 일본의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부당성을 만국에 알리기 위해 참석을 시도했던 이준, 이상설, 이위종 열사가 머물렀던 호텔이 현재의 기념관이 되었다.

6월 15일부터 10월 20일까지 열렸던 회의에 일본 및 러시아 대표의 반대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회의장 밖에서 호소문을 전달하며, 대한제국의 뼈아픈 현실을 눈물로 호소했을 세 분의 모습을 떠올리며, 가슴이 몹시 쓰리고 아팠다. 회의 기간 동안에 순국한 이준 열사의 사인은 아직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아! 이준 열사』, 사단법인 이준 아카데미)

올 봄에는 윤봉길 의사 의거 현장인 상해의 홍꼬우 공원을 방문해 기념관에서 의거 현장을 생생히 담은 비디오를 보며, 24세의 젊은 청년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한, 그 비장한 심정에 젖어 보기도 했다. 이분을 격려하고 지도한 김구 선생과 서로 손목시계를 교환하고, 거사를 하기 위해 분연히 떠나는 이분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거사 후 붙잡혀 감옥에 있다가 결국 총살로 짧지만 위대한 생을 마감했다.

또한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상해 임시정부 기념관에 들러, 당시 임정의 실상을 좀 더 알게 되었고, 중국의 국민당을 좇아 수없이 사무실을 옮겨 결국 중경까지 가야 했던, 이들의 고난의 행군을 알게 되었다.

올 봄에는 대학 동기들과 고려인들이 모여 살았던 블라디보스톡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가난하고 무지했던 고려인들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며, 특히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 생애를 바치고 61세에 일본군에게 총살당한 “최재형” 선생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대륙의 영혼, 최재형」 이수광 역사소설).

최 선생은 눈물겨운 연해주의 항일투쟁의 독보적인 존재로, 상해 임정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며 초대 재무총장을 지냈고, 안중근 의사를 적극 지원했다(거사에 사용한 권총도 이분이 사준 것). 함경도에서 태어나 가난을 이기지 못해 노비 신분의 부모와 온 가족이 중국을 거쳐 연해주로 이주한 후에 , 가정 사정으로 11세에 가출하고 러시아 선장 부부에게 입양되어 교육을 받았다. 그 후 사업 수완을 발휘해 군 납품업자로 거부가 되었다.

그러나 최 선생은 이에 안주하지 않고 러시아 정부의 공직자로 고려인들을 위해 통역 등 많은 수고를 하였고, 더 나아가 이들의 교육을 위해 사범학교를 설립했다. 최 선생은 일본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신문 “대동공보”를 발간했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인촌의 독립운동 단체인 “권업회”를 창설하여 회장을 맡았고, 연해주의 한인 의병 활동을 지원하는 등, 온 생애를 조국에 바친 진정한 애국선열이었다.

연해주에서 들은 가장 가슴 아픈 과거사는 이러했다. 1937년, 스탈린이 우스리스크 부근의 “라즈돌로 노예”라는 기차역에 약 175,000명의 고려인들을 강제 소집해, 조그마한 화물칸에 짐짝처럼 태웠다. 기차 속에서 며칠 동안 고려인들은 대소변도 가릴 수 없었고, 병든 부모를 창 밖으로 던져야 했다. 황무지 시베리아 벌판에 내팽개쳐진 이들은 얼음땅을 눈물로 개간하며 살아 남았다.

조국이 가난하여 비참한 삶을 경험했던 선조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생을 불태운 수많은 열사들을 생각하며, 세계 경제 12위 국가라는,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 낸 조국 대한민국이 다시는 이러한 슬프고도 쓰라린 길을 밟지 않게 되기를 오늘도 엎드려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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