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여인은 반 너머 살았다고 하는 마흔이라는 나이에 남편을 사별하고 일남 일녀를 데리고 기회의 나라 미국으로 왔다. 낯설고 물 설은 곳에서 그녀는 생존경쟁의 투사가 되어 이를 악다물고 앞만 보고 정신없이 살아온 억척 여성이었다. 그렇게 하기를 십여 년!! 세월에 떠밀려 머리가 커진 아이들이 제각기 갈 길을 찾아 그녀의 곁을 떠나갔다.

그녀는 허탈했다. 밤이면 무서운 외로움에 파르르 몸을 떨기도 했다. 또한 체력의 한계도 느껴졌다. 지친 심신을 달래 줄 따뜻한 마음이 그리웠다. 그녀는 숱한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적지 않은 주저 끝에 용기를 내어 상담실을 찾았다. 그런데 그녀가 찾는 조건에 맞는 50대의 한국 남자를 찾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실망한 듯, 그녀는 눈을 아래로 깐 채, 한숨을 가늘게 토해냈다.

보기가 민망스러웠다. 조심스럽게 “미국인은 어떠냐?”고 물었다. “언어와 사고 방식이 달라 불편한 점도 많겠지만 친구 정도야 어떻겠느냐.”면서 가볍게 머리를 끄덕거렸다. 나는 즉시 우리 상담실의 고객이자 모 전자회사 사장인 ‘데뉴’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했다.

며칠 후 ‘데뉴’로부터 그녀와 같이 모모 장소로 나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데뉴’가 소개한 남자는 허름한 작업복 차림의 50대 초반인 독일인이었는데, 그도 이민 와서 가진 것 없고 배운 것이 없어, 어떤 회사에 청소를 하러 다닌다고 하였다. 그녀가 실망한 것 같아 마음이 조였으나, 광신자였던 부인이 집을 나간 후 십 년 간 두 아들을 키우며 성실히 살아가고 있다는 독일인에게 그녀는 연민을 느끼고, 풍부한 대화에 호감이 갔던 것 같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일 없는 주말마다 만났다. “코 큰 놈하고 데이트를 하려면 돈 많은 놈을 찾지, 왜 하필이면 청소부냐?” 라는 친구들의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가난은 죄가 아니다. 기댈 수 있는 믿음직한 어깨가 돈보다 그리워서 그를 만난다” 라고 친구들의 말을 일축해 버렸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그녀는 세계에서 제일 크다고 소문난 벼룩시장에 가서 두툼한 장갑 한 켤레를 사서 예쁘게 포장하고, 독일인에게 “새벽에 쓰레기통을 치울 때 손 시리지 않게 이 장갑을 끼라.” 고 말하며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었다. 장갑을 받아 든 독일인은 놀라는 눈빛으로 그 장갑을 끼어 보더니 무척 감격하는 눈치였다.

해가 바뀌고 2월 14일, 연인끼리 초콜릿과 꽃다발을 주고받는다는 발렌타인 데이에 독일인은 장미꽃 한 송이를 사들고 와서 그녀에게 청혼하였다. 그녀는 ‘잘 난 척, 있는 쳑‘  하지 않고 순수한 그 남자가 좋았고, 외롭지 않아서 좋았다. 자신도 전자회사 여공이었기에 같은 처지에 있는 독일인의 구혼을 마다 할 이유가 없었다.

결혼 날짜를 일주일 앞둔 어느 날이었다. 독일인은 그녀를 데리고 보석상으로 갔다. 이것저것 만지던 독일인은 14K로 된 두 개의 실반지(웨딩 밴드)를 집어 그녀에게 보여 주고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주고 싶었지만 내가 너무 가난해서 이 반지를 살 돈조차 부족해. 그러니 반지 값을 반반씩 지불하면 어떨까?” 독일인은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그녀가 언뜻 훔쳐 본 반지 값은 180불이었다. 그 순간 그녀는 아무리 청소부라도 반지값 하나 지불할 수 없다는 무성의에 무시를 당한 것 같아 그 반지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눈치 빠른 독일인이 “자존심이 상했다면 용서를 바란다. 동양여자들은 결혼식 날 무엇을 받느냐에 따라 신랑의 인격이 평가된다던데,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복권에 당첨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 면서,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생각했다.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으려고, 새벽 별을 보고 나갔다가 밤별을 보고 들어오는 지치고 힘든 여공생활을 면하려고 결혼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사람이 그립고, 그녀만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어깨가 그리워, 사람 냄새를 맡으러 가는 것이라고. 가장하지 않는 진실에 마음이 간다고.

 

그녀는 반지값 전액을 지불한 다음, 자존심을 꺾고 그 말을 할 때까지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 것인가 하여, 오히려 독일인을 위로했다. 독일인은 그녀의 손을 잡고 감격한 듯 몇 번이고 미안하다며 머리를 숙였다.

이윽고 결혼식 날이 왔다. 그런데 그날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둘만 조용히 하자던 결혼식장은 파도 치는 해변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호텔이었고 하객들도 중후해 보였다. 예물 교환을 위해 마련했던 14K의 실반지는 콩알 만한 크기의 광채가 요란한 다이아몬드 반지로 둔갑했다. 그녀는 어색했고 혼란스러웠다.

결혼식도, 피로연도 끝나고 둘만이 스카이라운지의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았다. 그녀는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서 독일인에게 건네 주며 이런 허식이 왜 필요했느냐고 나무라며, 빌려온 반지를 낀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고 말했다. 왠지 독일인이 측은하게 보여 그녀는 눈시울을 적셨다.

독일인은 다시 그녀의 손에 반지를 끼어 주고, 보증서를 건네 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청소부가 어떻게 큰 돈을...” 그녀는 할 말을 잊은 채, 눈을 크게 뜨고 독일인을 바라보았다.

독일인은 “나는 청소부가 아니라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 박사 학위도 있다. 당신을 속이려고 한 것은 절대 아니다."라면서, “친구들의 권유로 선을 많이 보았지만, 국적과 나이를 막론하고 여자들은 대개 첫 대면에서 수입이 얼마냐, 집이 있느냐, 아이가 있느냐를 묻는다."고 말하였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고 시간당 3불 50전을 받는 청소부라고 하면 여자들은 차 한 잔 마시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더라고 독일인은 말했다. 그럴 때마다 독일인은 코끝이 시리는 찬바람을 맛보았다고 했다. 독일인이 원하는 상대는 은행구좌를 노리는 여자가 아니라고 했다. 진실한 여인, 황금에 굴복하지 않는 여자를 찾기 위하여 긴긴 세월을 청소부로 가장했노라고 말했다.

그녀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시험대상이 되어 장장 2년 동안 속아 온 것에 화가 났고 자신의 우둔하고 미련한 감정에 화가 났다. 그러나 여자들로부터 당한 실망이 얼마나 컸으면 그랬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고, 대기업의 간부라는 말도 듣기 좋았다.

그녀는 지금 마냥 행복해 하고 있다. 독일인은 부자는 아니었지만 고급공무원이었다. 새벽 별을 보고 직장을 갔다가 밤에 뜨는 별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던 고달픈 여공 생활에서 벗어나, 그녀는 앞치마를 두르고 아기자기하게 집안을 가꾸며 남편을 받들며 열심히 살고있다.

돈을 어깨에 지고 가겠는가? 머리에 이고 가겠는가? 생각하는 것이 소박했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깊었고 질곡의 생활 속에서도 늘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아온 그녀에게 하나님께서 큰 축복을 주셨다며, 우리는 그녀를  “50대의 신데렐라”라고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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