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갈라디아서 4:19-20).

성경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의해 돌아가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오늘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죽어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남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 제물로 바쳤는데,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분의 십자가 앞에 꿇어앉아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하지만,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고통에 동참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분의 희생 앞에서 세상적인 성공과 안위만을 추구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라고 고백하면서 정작 자기 십자가를 지지 못하는 우리들에 의해 그분은 오늘도 쓸쓸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모여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면서, 우리는 미워하고 분열하고 서로를 죽입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온 몸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고 있습니다. 교회의 이름으로, 믿음의 이름으로, 그분을 믿는 이들의 마음 안에서 그분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무신론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교 안에 있는 우상과 광신, 맹신과 근본주의에 의해 죽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분을 모르기 때문에 그분을 죽이지 않습니다. 그분을 안다고 생각하고 그분께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슬픈 일입니다.

 

예수님을 살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처럼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처럼 우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만 행복하기를 바라는 기도를 그만두어야 합니다. 자기 집단만 행복하기를 바라는 기도를 그만두어야 합니다. 자기 혼자만 그분의 뜻을 따르겠다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그분을 어떻게 살릴 수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4장 19절에서 사도 바울은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라디아인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도록 바울은 해산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해산의 수고, 그 고통은 십자가입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예수를 살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 우리는 우리 안에서 죽은 예수를 살려야 합니다. 우리의 사고, 우리의 욕심, 우리의 변명으로 인해 죽은 예수님을 살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살려놓지 않고서는 예수살이를 할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죽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그분은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지금도 그분은 살아계십니다. 여기서 예수를 살린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살지 못하여 죽어가는 예수님을 살리자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그리스도를 살리자는 것입니다.

그분이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오르신 골고다 언덕을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함께 올라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임무는 그분의 골고다 행을 막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분의 사역입니다. 우리는 감상에 젖어 그분의 수난을 가슴아파합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분이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슬퍼하고 아파하며 감상에 젖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 골고다를 향해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지 않고 골고다를 오르지 않을 때, 그분은 우리 안에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이천 년 전 그분은 당신의 말씀을 듣는 청중을 향하여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기존의 사고를 완전히 바꾸지 않고선 복음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적인 사고를 버리고 돌아서지 않으면 복음을 따를 수 없습니다.

오늘날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듣는다면, 그 새로운 해석을 배우기 위해 당신의 사고와 행동을 바꾸셔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날의 복음 해석에 적응하지 못하여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선포하는 우리 입에서 나온 그 예수라는 이름에서 정작 예수님이 고립되는 것은 아닐까요? 이렇게 예수님을 고립시키면서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를 살려 달라고, 이 세상에 평화와 정의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그분은 누구일까요? 어느새 우리는 ‘다른’ 예수를 믿는 것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것도 예수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우리의 교리와 생각으로 ‘다듬은’ 예수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교회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예수살이를 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과연 우리가 예수살이를 해낼 수 있을까? 예수님 스스로도 살 수 없는 그 복음살이를 우리가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 기도하기 전에 먼저 예수 살리기 운동을 펼쳐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다니심을 보고 세례 요한이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말하자, 함께 있던 그의 두 제자가 곧바로 예수를 좇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구하느냐?”,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어디 계시오니까?”하고 예수님께서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디인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와 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가서 그분이 머무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중 하나였던 안드레는 자기 형인 시몬을 찾아가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전하면서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갔습니다(요 1:35-42).

그들이 가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메시아라고 믿게 만들었을까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이 머무시는 곳을 보여주셨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그곳에서 그분의 삶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삶에 감명을 받아 그것을 자기 형과 이웃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묵상하면, 예수님의 탄생 장면이 떠오릅니다. 큰 별이 나타나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하는 초자연적인 일이 발생했지만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은 초라한 말구유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동방에서 온 박사들과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은 구세주이신 아기 예수를 만나 경배하였습니다.

아기 예수를 팔에 안은 시므온은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라고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에게서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아기 예수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예수를 따라 나선 요한의 두 제자가 본 것은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서 본 삶은 세례 요한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어린양’ 같은 삶이었을 것입니다(사 53:7-9).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십자가 죽음에까지 어린양처럼 순종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삶을 본 그들은 예수살이를 하려고 지난 삶을 정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화려한 궁전을 지어, 우리가 좋아하는 색깔로 장식한 옷을 강제로 입혀 궁전 안에 모셔놓고 그곳에서만 살도록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분은 교회와 성직자들과 성도들의 입에만 살아 있고, 그들의 삶 속에서 죽어 있는 건 아닐까요?

예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지만, 정작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그분의 복음이 아니라 우리가 해석하고 그 수위를 조절한 ‘우리’ 복음, ‘나’ 복음이 아닐까요? ‘그분은 그리스도, 나의 주인이십니다.’라고 외치면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살지 못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고백하면서도 우리는 남을 위하여 살지 못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원수를 사랑하라’고 외치면서도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 사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 살 수 없다면서 십자가를 향해 예배드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십자가 질 것을 강요하면서, 정작 자신의 십자가는 장신구로 만들어버리지 않았나요? 우리의 사고와 교리 안에 갇힌 예수는 더 이상 예수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살리고, 예수살이를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살리지 않고는 예수를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 우리 안에서 죽은 예수를 살려야 합니다. 그것은 바울의 표현대로 해산의 고통이 따르는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의 사고, 우리의 욕심, 우리의 변명 때문에 죽은 우리 안의 예수님, 그분을 살려내야 합니다. 우리의 사고, 우리의 욕심, 우리의 변명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죽는 것이 사는 것임을 깨닫는 날, 나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나의 삶으로 살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살이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를 소개합니다. 예수살이를 잘 보여 주는 기도입니다.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하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에 맞춰 우리의 삶을 점검해 봅시다. 평화의 도구로 쓰임 받고 있는지,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심고 있는지? 한 문장 한 문장이 예수살이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시기 위해 해산의 고통을 감내하실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시고, 우리의 삶이 예수살이로 드러날 때, 우리는 이 시대에 복음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로서 우리의 삶이 세상에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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