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성경 그리고 분별 (9)

성령은 경험으로만 이해된다

닐 앤더슨과 티모시 워너 공저의 『영적 전쟁을 위한 초보자 가이드』(한국어판 제목 『영적 전쟁 이렇게 하라』)에는 어느 신학교 교수의 용기 있는 고백이 소개되어 있다.

“나는 성경 지식이 해박했고 ‘성경만으로 충분하다’라고 말하며 자만했다. 그러나 어린 자식이 치료 불가능한 신장암 판정을 받았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성경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물론 성경이 대단히 권위적인 가이드로서 도움이 된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하나님을 직접 느끼지(feel) 않고는, 성경은 내게 거의 위안이 되지 못했다.”

성령을 이해하는 데 결코 놓칠 수 없는 단어가 바로 ‘느끼다, 경험하다’라는 말이다. 성령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 없이 우리의 믿음과 분별의 수준은 결코 올라갈 수 없다. 하나님을 아는데 다메섹에서의 사도 바울과 같이 ‘개인적인 대면의 체험’이 다뤄져야 하는 것과 같은 논리다.

우리의 일상에서 성령의 현존 없이는,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이 우리의 삶 가운데 현실적이고 직접적으로 표현될 수 없다. 우리의 일상에서 성령의 현존 없이 는, 요한복음 14:26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이 생각날 수 없다. 우리의 일상에서 성령의 현존 없이는, 요한복음 16:13 말씀처럼 우리가 진리 가운데로 인도될 수 없다. 이처럼 성령은 오직 우리의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이라는 도구를 통해서만 우리 가운데에서 살아지고 설명될 수 있다.

따라서, 성령은 가르쳐서 될 일이 아니다. 성령은 개념이나 지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가 함께하면서 체험되어야 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구체화된 인격이시다. 성령은 우리가 저만치서 존경하고 감상할 객관적인 대상이 아니다. 성령은 우리가 감동감화 받아야 할 우리 안에 계신 주의 영이시다. 그런 분이 우리를 도와 일정 수준 혹은 그 이상으로 하나님을 닮아가도록 변화시킨다. 이런 과정을 성화라고 하자.

세상 사람들이 올바른 판단을 위해 이 사람 저 사람, 이 지식 저 지식을 찾아 분주할 때, 크리스천인 우리들은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기를 울부짖는다. 이처럼 크리스천은 세상의 안목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이성적인 부류가 된다. 그래서 로마 시대의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붙여진 ‘레지던트 에일리언(Resident Alien)’ 즉 이 세상에 거주하나 이 세상 사람처럼 살지 아니하는,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외계인과 같은 자들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에게도 성령은 단순한 비인격적 포스나 영향력이 아니었다. 성령의 오심은 하나님 자신이 그의 백성들에게 다시 나타나신다는 것에 대한 약속의 성취다. 요한복음 14:16은 이를 확인해 준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어디에서 이보다 더 위로가 되고 확신을 주는 말을 찾을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늘 옆길로 새기 쉬운 우리를 위해, 하나님은 예수님과 비교해 조금도 부족함 없는 지식과 위로와 지혜를 가진 그의 또 다른 보혜사를 우리에게 보내신다는 것. 성령을 통해 우리를 그의 선한 목적 가운데 인도하신다는 것. 이게 우리들의 ‘성령에 의한, 성령을 통한’ 분별의 확신이어야 한다.

그래서 요한복음 14:1 말씀처럼, 우리는 마음에 근심할 필요가 전혀 없다. 요한복음 14:18 말씀처럼, 우리는 결코 고아처럼 버려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8 말씀처럼, 성령이 오실 때 권능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힘 없이 버려지지 않는다. 도리어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약함을 자랑하고 우리의 약함 가운데 기뻐하는 것이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 안에 머물게 된다는 것을 안다.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우리는 약할 때 도리어 강하게 되기까지 한다(고후 12:9-10). 이런 ‘신비’를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까지 강해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수고와 투자를 해왔던가? 그런데 소위 예수주의자라는 자들은 도리어 약해지기를 바라고 있다니? 자진해서 죽기까지 한다고?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받아들이고 예수를 따르기로 작정한 이상, 성령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 아니 더 근본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미지대로 이 세상에 나올 때부터, 이미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성령의 부재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의 이미지를 가질 수는 없다. 따라서 성령은 우리의 태초부터 이생에서의 삶을 마칠 때, 아니 그 이상까지 우리와 늘 함께 계신다고 믿는 게 더욱 근본적인 믿음이다. 따라서 우리 맘대로 성령을 오라가라 할 수 없다(이런 면에서 소위 성령운동가들의 활동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성령의 근본적인 내주하심을 얼마나 믿는냐이다. 그 무엇으로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낼 수 없듯이 성령도 마찬가지이다. 성령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불멸의 씨앗’이다.

 

성령에 충만한 삶을 산다는 것이 비현실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팬인가 제자인가』의 저자 카일 아이들만은 그의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다음 문장을 마무리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청했다.

‘성령의 권능으로….’

24시간 만에 100명 이상의 댓글이 올라왔다고 한다. "성령의 권능으로 마침내 아버지를 용서했습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150파운드를 감량했고 담배를 끊었습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전 남편의 부정함을 용서했습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우리는 에티오피아에서 두 남자 아이를 입양했습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마약중독에서 해방됐습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성 중독증에서 해방됐습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식습관 장애를 극복했습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남편 없이도 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를 키울 수 있었습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결혼생활의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임신이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성령의 권능으로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3년 동안 집 나간 아이가 돌아왔습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남편이 죽은 후에 내 인생도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평화를 찾았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아직도 비현실적이라 생각하는가? 다시 말하지만, 성령이 하시는 일은 매우 개인적이고,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분별의 과정에서 성령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성령의 인도하심 없이는, 성령의 권능 없이는, 그 어떤 변화도 일시적이고 변동적이며 그 끝을 장담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삶의 가장 중요한 어느 순간에 분별을 하고 있다. 가장 지혜로운 선택을 하고 싶다. 조삼모사가 아닌 영구적이고 축복된 그런 결정을 하길 원한다. 성령의 열매가 맺히기를 갈구한다. 그래서 성령을 매일 소리쳐 부른다.

“베니 상떼 스피리투스(Veni Sancte Spiritus: 오소서, 성령이여)!”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