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7-12)

‘기도는 천국의 언어이다.’ 저는 이 말이 참 좋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다.’ 이 말도 참 좋습니다. 호흡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듯이 기도하지 않는 영혼은 죽은 영혼입니다. 그러나 기도가 천국의 언어라는 말이 더욱 귀합니다. 기도를 모르면 천국에서 의사 소통을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도는 공동체로의 부르심입니다. 영혼의 호흡은 개인적인 기도의 필요성을 보여 주지만, 기도가 천국의 언어라는 말은 우리를 공동체로 부릅니다.

그럼 기도란 정확히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나타나는 기도의 그림은 분명합니다. 기도란 구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뭔가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우리가 주기도문이라 부르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와 구약에서 성전을 완성한 후 드리는 솔로몬의 기도를 살펴보아도 기도는 분명 구하며 요청하는 것입니다.

기도란 구하는 것이며 거기에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인격적 관계, 즉 체험적 상호 작용이 전제됩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친구가 친구에게 요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란 우리의 자연스런 관심사를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이웃을 위한 기도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도 들어 주십니다. 시편을 보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란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행하는 일에 대해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는 관심사를 숨김없이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물론 하나님의 관심사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관심사에 관심이 있으시며, 우리의 관심사는 그분의 관심사와 일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삶이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어차피 당신이 하실 일을 하면서 우리 기도에 응답하는 것처럼 가장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요청은 하나님이 하시거나 하시지 않는 일에 변화를 가져옵니다. 어차피 모든 일은 우리의 기도와는 무관하게 마땅히 되어야 하는 대로 된다는 개념은 하나님을 믿는 많은 이들의 생각을 사로잡는 망령입니다. 그것은 기도를 심리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며, 우리의 기도를 죽은 ‘의식’(허례허식)으로 만듭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32장을 봅시다. 모세는 산에 올라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머물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백성들의 마음이 동요되었습니다. 한 차례 반역 사건이 있었는데도 모세가 돌아오지 않자 그들의 마음은 애굽으로 돌아섰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며 난장판을 벌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진노하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10).

이 상황에서 모세가 보인 반응(창 11:13)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기도에 대해 가장 깊은 교훈을 주는 본문 중 하나입니다.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회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모세는 조목조목 따지면서 언약을 맺으시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특별한 이름인 “여호와”께 주의 백성을 멸하실 뜻을 돌이켜 달라고 담대히 청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뜻을 꺾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모세의 기도로 하나님의 의도가 바뀌고 하나님께서 변화되셨습니다.

열왕기하 20장을 봅시다. 유다 왕 히스기야에 관한 기사입니다. 그는 이미 기도 응답을 수차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과의 대결이 좋은 예입니다(왕하 19:8-37). 시인 바이런은 이 사건을 기념하여 “산헤립 멸망”이라는 시를 짓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의 친구인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왔습니다.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20:1). 히스기야는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였습니다. 통곡하며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설득합니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죽음을 선고하고 나가는 이사야가 왕궁을 벗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돌아가 히스기야에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을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하나님은 그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그의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그의 기도가 응답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하나님을 돌이키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변화시켰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신실한 종들의 이유 있는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의 뜻보다 기도하는 자의 뜻이 더 합당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식이 틀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당신에게 신실한 종들의 요청을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인격적 관계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본질과 정체와 전체적 목적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 개개인과 관련된 많은 특정 문제들에 대한 그분의 뜻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분의 격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상황에서 뜻을 바꾸실 수 없는 하나님이야말로 능력이 유한한 하나님일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들 자신의 성품입니다. 기도란 무엇보다 성품을 형성하는 길입니다.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그분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시고 우리의 중심을 꿰뚫어보십니다. 기도는 자유와 능력을 사랑에 접목시켜 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서 얻으시는 것은 우리가 갖추게 될 인격입니다.

우리에게 유일하게 가치 있는 삶이란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그분의 능력을 받아 원하는 일을 능히 할 수 있는 인격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세세토록 왕 노릇” 할 준비를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계 22:5). 천국 백성으로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려야 하는 것은, 때로 기도 응답에 다른 이들이나 나 자신의 변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그보다 더 큰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인간의 범위를 벗어나 영적 세계에서 벌어지는 싸움이 개입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구하고 또 구하며 찾고 또 찾으며 두드리고 또 두드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요청을 끝까지 거두지 말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계속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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