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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해 사는가?
최태선 목사  |  어지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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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9.24  03:4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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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5:14-15).

작금의 한국 교회의 모습은 삼십 년 전 영국의 모습을 꼭 닮았습니다. 당시 존 스토트 목사는 설교를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영국은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다. 이제 교회는 박해받기보다는 무시당하고 있다. 교회의 혁명적 메시지는 신도시의 부르주아들을 위한 이 빠진 신조로 전락했다. 더 이상 아무도 그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방해할 만한 것을 정녕 말하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타협을 줄인다면 틀림없이 고난이 더 많아지리라 확신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구원이 전적으로 값없는 과분한 선물이라는 원초적인 복음을 굳게 붙든다면, 십자가는 교만한 자들에게 다시 한 번 걸림돌이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높은 도덕적 기준-타협할 수 없는 정직과 양심, 혼전 순결, 부부 정절, 커다란 희생적 사랑-을 그대로 지킨다면, 교회가 청교도주의로 회귀했다는 대중의 항의가 빗발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삶과 죽음, 구원과 심판, 천국과 지옥 중 양자택일에 대해 다시금 당당히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세상은 그런 ‘구닥다리 쓰레기’에 대항해 분노하며 일어날 것이다.

신체 폭력과 투옥과 죽음은 오늘날 서구 그리스도인들의 운명이 아닐지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절은 의심의 여지없이 조롱과 배척을 불러 올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고난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기에 놀라지 않는다. 도리어 우리는 ‘그분을 위해’ 살고 고난 받고 죽는 것을 특권으로 여길 수 있는 은혜를 구해야 한다.”

존 스토트 목사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위해 살고 고난 받고 죽는 것을 특권으로 여길 수 있는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라고 확신에 찬 선언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마땅히 그래야 할 것입니다. ‘강권하다’라는 헬라어 동사 ‘수네케’는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을 에워싸는 무리를 묘사할 때 사용되었으며, 예루살렘을 완전히 포위하는 로마 군대를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누가는 질병 등으로 꼼짝 못하게 된 상황을 묘사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강권하다’는 강렬한 동사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큰 사랑으로 눌림을 받은 것입니다. 여지를 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 느낌을 네 가지 확신으로 설명합니다.

첫째,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모든 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그가 로마서 6:23에서 말하는 대로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만 죽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고,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출발점입니다.

둘째, 그런즉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곧 우리 모두의 죽음을 대신한 것입니다. 그런즉 모든 사람이 죽었습니다. 육체적으로 죽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그분의 죽음에 동화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분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이 되었습니다.

셋째, 그분은 다시 사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부활로 이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새 생명을 소유한 자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부활의 새 생명은 우리가 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부활 신앙이란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으로 말미암아 이미 우리 안에 있는 부활의 새 생명을 믿고 그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넷째, 그분이 죽으시고 다시 사심은 산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분명한 목적을 가진 죽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목적은 이제 우리가 그분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위해 살도록 그분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살아나셨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항거할 수 없는 논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면 오늘 우리는 새 생명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분의 사랑에 전적으로 힘입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진리를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위해 사는 삶이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자아가 끝까지 저항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날마다 쳐서 복종시키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분을 위해 사는 삶은 물론 그분께 순종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가고 복음을 증거할 때 기대하지 않았던 일들이 일어납니다. 고난이 따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고난이 따를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0-12). 또 마태복음 24:9에서는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예언은 성취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5장에 베드로와 요한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채찍질을 당한 후에 더 이상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엄명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유대인들의 공회 앞을 떠났습니다(5:40-41).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바울도 고난을 이와 비슷하거나 동일한 표현으로 기술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고전 4:10) 그리스도를 위하여 미련하게 고난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고후 4:11), 사도 바울의 옆에는 항상 죽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고후 12:10). 하도 많은 고난을 받다 보니 고난을 기뻐할 수 있는 믿음의 거장으로 성장했습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 21:13). 그리고 죽음을 향해 로마로 갑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모두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주신 선물이라 말합니다.

지금도 전 세계 곳곳에서 믿음과 고난이라는 선물을 모두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회교국가에서 사역한 한 의료 선교사는 지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의 오해와 비난과 훼방을 받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운명인가 보다.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과 눈먼 자들과 영적으로 갈급한 자들은 곤경 중에 수백 명씩 우리에게 오건만 일부 똑똑한 자들과 부자들과 부족한 것이 없는 자들은 우리를 비방하고 훼방하기에 바쁘다. 주 예수님이 육체로 그들 가운데 살아 계실 때 그분께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분을 위해 침뱉음을 당하는 것이야말로 세상 최고의 특권이다. 우리가 그 일에 합당한 자이기를 소망한다.”

공산치하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구 소련에서 3대에 걸쳐 핍박받은 복음주의 기독침례교단협의회 총무 게오르기 페트로비치 빈스는 자서전 『3대에 걸친 고난』을 1976년에 출간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시베리아와 극동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다 1943년, 수용소에서 죽었습니다. 어머니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 자신 또한 1966년부터 1969년까지 3년간 옥살이를 했습니다. 1974년 그는 다시 체포되었고 5년 징역에 5년 유배형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를 위해 탄원서를 제출한 그의 아들도 1년 간 감옥에 갇혔습니다. 1979년 4월, 소련에서 추방되었습니다.

3대에 걸친 박해를 견딜 수 있었던 힘에 대해 빈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는 히브리서 11:24-26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것은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신 말씀이었다. 당대 러시아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처럼 그는 일시적 낙과 이 땅의 보화를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고 그리스도로 인해 비방을 당하는 것이 더 낫다는 성경의 진리를 알고 있었다.”

우리 시대의 최대 위기는 고난의 상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되어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셨지만 제자가 되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는 가르침이 교회 안에서 용인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그분의 제자가 되어 삶의 구석구석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흥의 신학을 폐기하고 주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속적으로도 성공하고, 하나님 나라에서도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세상과 타협해야 하고 십자가를 거부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구원받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분명하게 선을 그으십니다. 믿음과 고난이 쌍둥이 은혜인 이유입니다.

십자가는 마지막 단어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은 빈 무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이기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소망 가운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소망 속에서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빈 무덤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음을 알기에 이 세상과 대면하여 고난을 이겨낼 힘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고난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고난의 길을 걸을 각오를 해야 할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누구를 위해 사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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