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아침 먹이를 주러 닭장으로 간 나는 가슴이 얼어붙는 느낌에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마당에는 여기저기 깃털들이 흩어져 있었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짓이겨지고 내장이 드러난 닭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습니다.‘이럴 수가! 여기까지 들짐승이 찾아오다니!’

지난 2월 중순, 생후 일주일된 병아리를 입양해 애지중지 길렀습니다. 8월 중순, 그 중 하얀 녀석(레그혼 품종)이 첫번째 산란을 했을 때에는 얼마나 대견하고 사랑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그 후 네 마리 녀석들은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유기농 또는 Cage free 달걀을 생산했습니다. 계란부침을 먹을 때마다 건강이 좋아지는 느낌이 들곤 했습니다.

아침 저녁 먹이를 주러 갈 때면 나를 알아보고 이리저리 뛰는 녀석들, 처음에는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겁에 질려 푸드덕거리며 줄행랑치던 녀석들이 이젠 무서워하기는 커녕 발 주위로 몰려와 빨리 달라는 시선으로 올려보기도 하고 함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습니다. 축산물 생산을 위한 가축이 아니라 중년에 얻은 반려동물이자 팬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틈만 나면 닭장 문을 열어 주어, 녀석들이 마당에서 놀 수 있게 했습니다. 운동도 하고 풀과 지렁이 등 먹고 싶은 것들을 찾아 먹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아내는 녀석들이 화단을 파헤치고 때로는 집밖으로 나가서 이웃들이 걱정한다며 마당에 풀어 놓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몇 차례의 줄다리기 끝에 아침과 저녁, 내 감독 하에 한 시간씩 풀어 주기로 했습니다.

어느 틈엔가 나는 자유를 주고 친환경 먹이를 먹여야 한다는 동물애호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제한된 시간에만 자유 활동을 하게 된 녀석들은 닭장 안에선 풀이 죽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녀석이 틈만 나면 닭장을 뚫고 나와 마당을 돌아다녔습니다. 녀석의 탈출 경로를 찾는 데 여러 날이 걸렸습니다. 녀석은 때로는 출입문의 작은 빈틈으로, 때로는 윗쪽을 덮고 있는 그물망을 뚫고 탈출했습니다. 기운이 넘쳐 2m 이상 높이 날아오르고, 5m 이상 날아가기도 했습니다. 그 녀석을 닭장으로 몰아 넣을 때마다‘얼마나 답답했으면!’하며 연민을 느꼈고, 닭장에 가두는 일이 미안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그날 사단이 난 것입니다. 짐작컨대 밤중에 들짐승이 닭장 주위에서 어슬렁거리자, 자다 깬 녀석들은 놀라 우왕좌왕했을 테고, 그 녀석은 그물의 느슨한 부분을 뚫고 밖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닭장 밖은 녀석에게 자유와 해방이 아니라, 들짐승의 공격에 의한 죽음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상실의 아픔과 보호해 주지 못한 미안함에 여러 날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문득 ‘자유의지’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우리의 본능 속에는 자유를 향한 갈망 즉 자유의지가 있고, 이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또한 그런 생각으로 녀석들을 닭장 밖에 풀어 놓아 더 많은 자유를 누리게 했습니다. 하지만 사건을 겪고 보니 울타리는 녀석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들짐승의 공격을 막아 주는 기능도 했던 것입니다.

반대개념으로 ‘종속의지’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제도 아래로 들어가려는 의지라고 할까요? 법과 제도는 우리를 억압하기 위해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보호 기능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도덕이나 율법, 결혼이란 제도, 전통이란 가치체계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들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종속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율법이나 제도를 지킬 때, 그것이 우리를 지켜 주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에게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라는 것은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순종이란 단어를 기분 나쁘게 들어서도 안 되고, 순종을 가르치는 것을 미안하게 여겨서도 안 됩니다. 종속에 대한 의지도 자유에 대한 의지만큼 중요합니다. 성경은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자유”를 가르칩니다(갈 5장). 사랑과 진리에 대한 종속의지가 내게 얼마나 있는지 돌아보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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