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성장 10

아브라함의 환대

오늘 “영적 성장” 마지막 시간에는 “공동체의 영성”이라는 주제를 함께 나눕니다. 영성은 공동체에서 자랍니다. 영성이 함께 자라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주의 깊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실제적인 이야기를 함께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영적인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다음의 내용들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해하기

흔히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이해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파커 팔머(Parker Palmer)는 “환대는 타인을 타인인 채로 내버려두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다른 것을 같게 만들려고 파괴하거나 혹은 다르다는 이유로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용납하는 환대가 공동체를 위해서 필요합니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화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대화할 줄 모릅니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심리학자인 앨버트 메러비안(Albert Mehrabian)은 사람들간의 대화를 연구하였습니다. 이 연구 결과를 메러비안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매러비안에 따르면 사람들간의 대화에서 말이 차지하는 비중은 7%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외에 목소리, 표정, 태도 등이 의사소통의 93%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이는 대화에 있어서 말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말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누군가를 존중하면서 대화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대화를 위해서 말하는 것과 함께 중요한 것이 듣는 것입니다.

듣기에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먼저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을 흔히 사오정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유행했던 사오정 시리즈의 대표작은 이것입니다. 사오정의 적인 대마왕이 108계단을 내려오며 한 계단을 내려올 때마다 “우하하, 나는 대마왕이다” 말하면서 내려오는데, 마지막 계단을 내려오자 사오정이 이렇게 묻습니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공동체에는 사오정처럼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두 번째 유형은 듣는 척하기입니다.  이 사람은 듣기는 듣는데 선택적으로 듣습니다.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것만 듣습니다. 혹은 들으면서 딴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 사람이 제일 많이 하는 말은 “뭐라고?”입니다. 듣지 않다가 갑자기 사람들이 웃으면 “뭐라고? 뭐라고?” 묻습니다. 이런 사람은 바쁘기 때문에 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바쁘면 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또한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듣지 않습니다. 남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없으면 다른 사람의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세 번째 유형은 적극적 듣기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주의 깊게 듣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욱 발전시키면 공감적 듣기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같은 마음으로 느끼면서 듣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공감하면서 듣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치유가 일어납니다. 함께 마음을 다해서 들어 주고, 함께 울어 주는 것만큼 우리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것이 없습니다.

공동체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대화의 노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화를 하면서 부주의한 표현이나 표정으로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남의 말을 공감하기커녕 잘 듣지도 않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는 공동체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려깊은 대화로 서로를 이해하고자 노력할 때, 공동체는 이루어집니다.

약하고자 하는 용기

공동체는 약하고자 하는 용기를 실천할 때 이루어집니다. 데이빗 보쉬(David Bosch)라는 선교신학자는 예수님의 영성의 특징을 “약하고자 하는 용기”(Courage to be weak)라고 불렀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기까지 약해지셨고, 주님의 약함을 통해 우리가 나음을 받는 은혜를 입었습니다(사 53:5).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강함을 추구하는 문화입니다. 강한 것이 좋은 것이고, 강한 것이 진리인 세상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약하고자 하는 용기를 실천하셨고, 주님의 제자인 우리에게도 약하고자 하는 용기를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영적인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약하고자 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영적인 공동체를 위해 필요한 환대를 메조리 톰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환대는 나의 공간 속으로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환대는 자신의 약함을 서로에게 인정하고, 진실하게 마음을 열 때에만 가능합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연다는 것은 나의 통제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상처 입지 않으려고 하는 나의 방어막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위험한 일을 감수하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타인으로부터 혹시 받을 수 있는 상처에 노출되도록 나의 방어막을 내려야 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공동체는 나의 방어막을 내리고 상대방을 나의 공간으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있을 때 이루어집니다.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때로 우리의 약함을 드러내고, 자존심을 내려놓고, 서로를 신뢰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인내하기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영성가 헨리 나우웬에게 그의 평생의 삶은 공동체를 찾아가는 여정으로 요약됩니다. 나우웬은 예일 대학과 하버드 대학의 교수직을 버리고 캐나다 토론토의 정신지체 장애우들과 함께 사는 라르쉬 공동체의 목회자로 갑니다. 그런데 나우웬은 그곳에서 지내던 처음 몇 년 동안 영적인 전쟁을 벌였다고 말합니다. 그곳에 가기 전에는 사람들이 못 보도록 꽁꽁 숨겨두었던 자신의 문제와 상처들이 드러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말합니다. “자신의 장애를 숨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봉사자들의 장애도 숨기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장애인들이 솔직하게 다가오면서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고, 숨겨두었던 내면의 문제를 고통스럽게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나우웬은 점차 라르쉬 공동체가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나우웬의 여정에는 영적인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씨름이 담겨 있습니다.

영적인 공동체는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랑과 인내로 노력하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함께 성장하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상대방도 성장하고, 나도 성장하는 곳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공동체는 하나님의 선물이고 축복이지만, 이것은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환대의 공동체를 만들려는 노력과 인내 속에서 영적인 공동체는 이루어집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사랑과 인내로 노력하는 교우들을 만날 때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많은 교우들을 만났습니다. 어떤 교우들은 교회가 자신이 추구하는 생각과 다른 것을 발견하고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어떤 교우들은 자신이 기대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다며 교회를 떠납니다. 어떤 교우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프로그램과 시스템이 부족하다며 교회를 떠납니다.

이렇게 교회를 떠난 교우들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섭섭한 생각을 가져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아쉬움은 있습니다. ‘생각이 다르다고 말하지 않고 함께 생각을 맞추어가는 노력을 해주었으면 어땠을까? 기대했던 사랑을 느끼지 못했다고 말하지 않고 그분이 사랑을 주려고 노력했으면 어땠을까? 자신이 원하는 프로그램이 없었다고 말하지 않고 함께 교회를 세워갔으면 어땠을까?’ 이런 마음에 아쉬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공동체를 이루려고 함께 애쓰는 교우들이 참 귀하고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서로를 이해하고자 애를 쓰고, 약하고자 하는 용기로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사랑으로 인내하려는 교우들을 보면 감사한 마음에 가슴이 뭉클합니다.

공동체는 만들어져갑니다. 그리고 함께 세워진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납니다(요일 4:12). 이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참 이상합니다. 우리는 절대 혼자 자라지 못합니다. 혼자서 성경을 매일 보고,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를 매일 들어도, 혼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자라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적 성장은 공동체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공동체 속에서 이해하고, 약하고자 하는 용기를 실천하고, 사랑으로 인내하는 가운데 우리는 다듬어지고, 자라고, 사랑받고, 주님을 느끼며 성장합니다. 그래서 영성훈련 중의 하나가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가꾸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우리를 영적으로 자라게 하는 중요한 영성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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