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5장

열왕기하 5장은 나아만과 게하시의 이야기입니다.

먼저 나아만부터 살펴봅시다. 아람의 대장군 나아만은 불치병인 나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나아만은 유대의 선지자인 엘리사라면 치료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말을 이스라엘 출신의 계집종으로부터 듣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왕의 소개서까지 이스라엘 왕에게 보낸 터라 나아만은 엘리사에게서 융숭한 대접을 받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엘리사가 마중 나올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문 앞까지 찾아온 나아만을 만나 주지도 않고 사람을 보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메시지만 전합니다. 화가 난 나아만은 요단강에 가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하인이 상황을 이해시키자, 나아만은 분노와 교만을 요단강 둑에 벗어두고, 강물에 몸을 씻고 나음을 받습니다.

 

이후 나아만은 새로운 삶에 적응하기 위해, 새롭게 형성된 기준점을 중심으로 삶을 재편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씨름합니다. 새로운 기준점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이제까지 암몬의 신 림몬을 섬겨왔습니다. 림몬 신은 나병을 치료하는 데 별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적국 이스라엘의 신이 자신을 만져 주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돌아와 이렇게 선언합니다.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15).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선물을 주려 했지만, 엘리사는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나아만은 새로 깨달은 신앙에 따라 태도를 분명히 하겠다는 결심을 보여 주려고 두 가지 일을 합니다. 첫째, 그는 하나님께 예배할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냈고, 둘째, 타협하고 싶은 마음을 정면 돌파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향한 시각의 재정비였고 후자는 자신에 대한 시각의 재정비였습니다.

두 번째 행보에서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내가 돌아가면 나의 주인인 아람의 왕이 내가 평소처럼 그와 함께 림몬 신당에 가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분은 나이가 많은 분입니다. 나는 팔로 왕을 부축해야 합니다. 그러니 그분이 절을 하면 나도 절을 해야 합니다. 별수 있겠습니까? 잘못인 줄 알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는 돌아가서 여전히 림몬에게 절을 할 것이지만 림몬을 마음으로 섬기지는 않겠다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나아만은 살아계시고, 사랑이 많으시고, 치료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새로운 믿음과, 생명력 없고 무용한 우상들에 둘러싸여 타협해야만 하는 지리멸렬한 현실 사이에 끼어 있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일단 하나님에 대한 사고가 바로잡히기 시작하면 삶의 오래되고 익숙한 경계선들이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부각되고 혼란이 불가피하게 일어납니다.

나아만은 현실과 적당히 타협한 사람일까요? 다니엘처럼 이스라엘을 향해 창문을 활짝 열고 이스라엘의 신께 기도해야 했던 것은 아닐까요? 나아만의 시작에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었습니다. 한 번에 한 걸음씩 전진해야 한다는 진리 말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가거나 신약성경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참 신이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처럼 사랑하시고 치유하시는 신은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당하시고, 그 가운데서 새로운 생명을 불러오신 하나님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일단 이 사실을 인식하면, 하나님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해도, 그분을 따르고 예배하고 싶어집니다.

로마서 12:1-3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일들이 요구됩니다. 핵심은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나아만 시대인 주전 9세기이든 21세기이든 새롭게 치유 받은 나아만이 실천해야 하는 모든 요소가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에 받아들여져도 습관적으로 림몬의 신당에 절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는 불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아만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타협하지 않은 척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타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올바르게 사고해야 하며, 피할 길 없어 보이는 일과 타협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아만처럼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길 원하나이다.” 하고 겸손하게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좋은 소식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평안히 가라.” 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과 이 세상에 대한 사고를 재정비하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엘리사처럼 말씀하십니다. “평안히 가라.”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옛 세상에서 살지만, 우리의 마음은 날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이번에는 게하시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게하시는 엘리사의 하인입니다. 하인이라 표현했지만 게하시는 엘리사의 제자입니다. 그는 엘리사를 따라다니며 놀라운 기적을 지켜보았습니다. 또한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는 모습과 응답받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런 그가 나아만에 대해 왜곡된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는 주인이 대가를 챙기지 않고 나아만을 보내 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적인 나아만은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을 받은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치유를 받으러 온 것과는 상황이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게하시는 급기야 거짓말을 하기에 이릅니다. 그는 나아만을 쫓아가 두 젊은이가 옷과 돈을 필요로 하더라는 이야기를 지어냈습니다.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습니다. 게하시는 엘리사가 눈치 채지 못하게 사환을 돌려보내고 돈과 옷을 그의 집에 숨깁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큰 거짓말을 합니다(25).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하니 대답하되 당신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아니다 게하시. 너는 타협했다. 너의 타협은 나아만의 타협과는 달랐다. 너는 자비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의 역사를 지켜보고도 이기적인 탐욕의 길을 선택했다.’

게하시는 나아만의 문둥병이 그대로 옮는 벌을 받았는데, 이는 그가 선택한 행위에 대한 확증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왜곡된 사고가 그의 모든 인생을 왜곡하고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게하시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나아만의 이야기가 하나님께서 타협을 용납하신다는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나아만은 말합니다. “제가 림몬 신당에 계속 나가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엘리사는 나아만이 감사하며 빛 가운데로 나아감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평안히 가라.”

게하시는 말합니다. “한 귀퉁이라면 맘몬 신에게 허락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엘리사는 그가 적극적으로 어둠 가운데로 들어가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그 어둠의 실체를 노출시켰습니다. 게하시의 생각은 여러 번 묶은 매듭처럼 꼬여버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의 모습은 나아만의 모습인가? 게하시의 모습인가?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변화가 나아만의 삶만큼 극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작점이 어디든지 엘리사가 나아만에게 해주었던 말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평안히 가라.” 이 평안 가운데, 다시 사신 예수를 통해 새로워진 마음으로 예수를 따르며 올바르게 사고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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