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린도후서 1:8-9).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명령은 “두려워하지 말라.”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이 명령의 아이러니는, 우리가 그토록 듣고 싶어 하는 명령임에도 다른 어떤 계명보다 순종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을 들어도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두려움 없이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두려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 두려움은 이미 숨 쉬는 공기와도 같아서 두려움 없이 사는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으며 살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을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에 놀라운 명령을 선포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음에서 일으키셨고 우리를 부르셔서 그분을 따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부활 사건은 그 너머를 보게 해줍니다. 이 모든 일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됨을 의미합니다. 믿음과 두려움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이 말했듯이,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요일 4:18). 그리고 부활 사건은 피조물인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의 계시입니다.

예수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순간, 삶은 변화됩니다. 걱정과 두려움 가득했던 삶 속에 믿음이 스며듭니다. 이러한 변화는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갑작스런 위기로 다가와 극적으로 우리를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고린도후서 1:8-9이 바로 그러한 예입니다. 바울이 아시아라고 부르는 오늘날 터키 지역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 바울은 치명적인 경험을 했다고 고백합니다.

얼마나 고난이 심했으면 살 소망이 끊어졌다고 말하겠습니까? 얼마나 막막했으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말하겠습니까? 고린도 교회에 보낸 두 번째 서신의 상당 부분은 바로 이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성공담을 기대하고 있었겠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인간적인 실패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 그리고 죽은 자를 다시 일으키시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임을 바울은 설명해야 했습니다.

바울이 사용한 언어는 우울하기 그지없습니다. 우울함이란 이러저러한 두려움들이 무리를 지어 원을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그 원을 끊임없이 돌고 돌도록 만듭니다. 걱정에 걱정이 꼬리를 무는 것입니다. 일단 한 가지 일로 걱정하기 시작하면 또 다시 그 원에 들어섭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그 원을 돌게 됩니다. 어느 순간 멈춘 것 같다가도 사소한 걱정 하나가 또 다시 우울의 수렁에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울함의 특성 중 하나는 자기 자신을 재판정에 세우고 스스로를 정죄할 증거들을 잔뜩 찾아내면서도 자신을 변호할 증거는 하나도 찾아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징역을 언도합니다. “나는 안 돼.” “난 끝났어.” “어쩔 수 없어. 이게 나야.”

바울의 우울함에서 두 가지 주요 원인을 발견합니다. 첫째,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그들은 반대만 한 것이 아니라 바울을 곤란에 빠뜨렸습니다.

그러나 둘째 이유가 더해집니다. 하필이면 바울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쇠약하던 바로 그때 그가 세운 가장 큰 교회들 중의 하나인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자신이 가르친 복음과 동떨어진 내용을 전하는 교사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바울의 잘못이었을까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충실하지 못했고, 그래서 하나님까지 실망시키게 된 것일까요? 바울은 모든 사역에 실패한 것일까요? 이런 악순환의 고리가 어느 날 사도 바울에게 닥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악순환의 고리 속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갑자기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뛰쳐나와서 말합니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바울은 그의 인생이 오해에 기초해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바울은 그 경험을 통해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천하의 바울이라 해도, 겸손이 인격의 모든 층들을 뚫고 내려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수년, 혹은 십수 년의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아시아에서, 우울함 속에서, 과거에는 도달하지 못했던 심연에까지 다다랐던 것입니다.

바울은 더 이상 자신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막바지에 다다랐습니다. 바울은 그의 마음 안에 있던 두려움이 자신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곳에서 벗어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바울은 여러 해 동안 예수님을 따랐지만 이제야 비로소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성령에 의지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바울과 같이 새로운 차원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두려워하는 습관에 길들여졌고, 이미 우울증에 빠져 있기 때문에 부활의 복음이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곳까지 이르는 일은 오랜 시간 애를 써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메시지가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들어올 수 있고 반드시 들어와야 합니다. 절망의 바닥을 경험하는 순간 복음의 메시지는 그곳까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강해지는 순간은 우리가 가장 약할 때입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의 힘은 다하고, 새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바람이 강력하게 불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 살다가 어느 날 우리의 모든 능력이 쇠하고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하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더라도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그분이 가시는 곳은 어디든 따르겠다는 결심이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곳, 아직 두려움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그곳에서 더 깊어지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내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신 하나님께서, 내 눈에서 눈물을 거두시며, 내 발이 넘어지지 않도록 지키실 것입니다(시 116:8).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신 하나님을 신뢰할 때 깊은 곳에 자리 잡았던 두려움들이 하나씩 사라질 것이고,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될 때, 우리는 믿음 가운데서 참 하나님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참 하나님은 두려움으로 움켜쥔 우리의 손을 펴시고 당신의 생명과 사랑을 쥐어주십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모든 문제를 그분께 맡길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 어떤 정황이 닥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침내 염려하지 않는 자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인생의 그 어떤 시련에도 당당할 수 있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1912년 4월 15일, 애니 평크는 침몰 직전의 타이타닉 호에서 마지막 구명보트에 몸을 실을 수 있었습니다. “보트를 내려.”라는 외침이 들리는 순간, 그녀는 갑판에 아직도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틈에서 어린아이를 데리고 있는 한 엄마를 발견했습니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그들에게 보트에 타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자리를 양보한 그녀는 침몰하고 있는 타이타닉호의 측면으로 구명보트가 하강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애니의 친구들은 한결같이 “애니는 능히 그런 일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타이타닉 호가 침몰하기 6년 전인 1906년, 애니는 선교사로 일하기 위해 인도로 향했습니다. 한 친구가 배편으로 가는 건 매우 위험하다고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두렵지 않아. 육지든지 바다든지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셔.”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살 소망이 끊어진 것 같은 어려움과 고난에 봉착합니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우리는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절망에 빠집니다. 우울증에 빠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사람들을 ‘염려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절망의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십자가는 그런 사람들의 희망입니다. 십자가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보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넘어 죽은 자를 살리시는 참 하나님을 바라볼 때, 노리치의 줄리안 성녀가 들었던 희망의 소리를 듣습니다. “모두 다 잘 될 것이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모두 다 잘 될 것이다.” 그리고 애니 펑크와 같이 우리도 십자가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두렵지 않아. 육지든지 바다든지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셔.”

그러므로 우리에게 닥친, 살 소망이 끊어진 듯한 극한 상황은 은혜입니다. “이는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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