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과 분별 6

네 번째,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분별은 자신을 의심하면서 시작된다. 분별이란 말에는 ‘의심하다’라는 뜻이 들어 있다. 그러니 성도들로 하여금 의심하지 못하게 하는 자가 있다면, 도리어 그자를 의심하는 것이 올바른 분별이다. “영감으로 전한 사도 시대의 예언조차 검증해야 한다면 오늘날 사람이 가르치는 그 어떤 것도 시험대에 올려야 마땅하다.”고 문제를 제기한 기독교 심리학자 제이 아담스의 말은 적절하다.

밴쿠버 리젠트 칼리지의 제임스 패커 교수는 다른 사람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아무리 불신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말한다. 이런 면에서 자신의 믿음에 대한 지나친 긍정은 금물이다. 우선 분별 과정에서 일어나는 내외적인 감정 변화를 의심해 봐야 한다. 왜 이런 마음을 주시는가?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내적인 감정은 오직 평화와 기쁨과 위로이다. 반대로 성령이 주시지 않는 감정은 낙담과 불안과 초조와 산만함일 것이다. (이런 감정들에 대해 좀 더 나눌 것이다)

내적인 감정의 흐름에 대한 조사와 함께 이뤄져야 할 것은 ‘일관성 혹은 일치에 대한 확인’이다. 성령은 변덕쟁이가 아니시다. 오늘은 기쁘게 했다가 다음날은 슬프게 한다면, 그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 아니다. 성령은 인간처럼 감정의 기복을 겪지 않으신다. 성령은 한결같고 안정적이고 평화롭다. 성령의 임재를 느끼는데 우리 마음이 들쑥날쑥하다면 이는 ‘어디서 왔는가”를 의심해야 하는 감정이다.

이때 성령의 인도나 지시 혹은 이로 인한 분별의 결과가 하나님의 말씀 및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지 점검해야 한다. ‘성령의 권능과 주관성’이라는 함정에 빠져 성경과 교회 공동체의 객관성에서 멀어지면 문제가 커진다.

성령이 말씀하신다면서 성경 말씀보다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라든지, 산상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비현실적이니 무시하라든지, 교회 봉사를 그만두고 다른 일거리를 찾으라든지, 반대로 시장에서 물건 잘 팔고 있는데 갑자기 목사가 되라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해 가족을 버리고 교회에만 전념하라든지, 반대로 가족만 챙기고 교회 일을 소홀히 하라는 제안은 성령의 지시가 아니다.

오른손에는 성경, 왼손에는 교회가 균형을 잡고 있을 때, 우리는 성령의 바람이 부는 대로 자유로운 항해를 할 수 있다. 이런 영적 균형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더 많이 엎드려라.” 기도하라는 말이다!

다섯 번째, 자신을 내보이길 좋아하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 중 맨 마지막 항목인 ‘자기 조절이나 자기 절제’가 빠진 상태이다.  자신의 감정이나 말이나 태도를 억제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확신 때문이다. 한 스랍이 제단 숯불을 가져와 이사야의 입에 대며 부정한 입술을 깨끗하게 만들었듯이, 이런 부류에 속한 자들의 입술 역시 정화되어야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찰리와 초콜렛 공장』을 쓴 영국의 아동 작가 롤드 달이 남긴 명언이 있다. “Show, not tell!(말로 하지 말고 보여 줘)” 성령 충만하다고? 그럼 보여 줘! 그동안 만나본 성령주의자들이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사도행전 2:44~46 말씀을!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이것이 성령의 진정한 열매가 아닌가? 마음으로 받은 성령을 몸으로 나누지 않으면 그 출처를 의심해 봐야 한다. 성령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시는 분이다. 몸으로!

 

여섯 번째, 성령의 인도하심을 잘못 받은 자들은 ‘기다리지 못한다.’ 이들에게는 인내심이 없다. 조급하다. 하나님의 뜻이 하루빨리 이뤄지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시계가 인간의 것과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들의 페이스에 하나님이 맞춰 주시기를 바란다.

예를 들어, 이들은 스스로 기간을 정해 놓고 결정한다. 산에 올라가 기도하고 결정한다. 여기까지는 좋다. 문제는 이 기간 중에 반드시 성령이 말씀해 주셔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본인이 정해 놓은 시간에 성령이 의무적으로 반응해야 하는 셈이다. 성령이 와 주셔서 결정했다고 하자. 다음에 또 다른 문제를 가지고 더 큰 산에 올라갈 것이다. 더 큰 문제이므로 더 확실한 성령의 응답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번에도 성령이 와 주셨고 결정이 옳았다고 하자. 그 다음부터는 더욱 더 큰 자신감을 갖게 될 것이다. 소위 성령을 받고 성령을 휘두르는 자로 등극할 것이다. 이게 죄 중의 가장 큰 죄인 교만의 선봉이라는 것을 모르는가?

아무리 말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은, 성령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은 교만이 아닌 ‘겸손’이라는 점이다. 성령을 받은 자, 성령의 임재 가운데 있는 자는 끝까지 겸손해야 하고 실제로 그렇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함정은 성령의 인도하심의 결과가 반드시 본인이 원하는 그것이라 굳게 믿는 것이다. 이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왜곡하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를 만족시키기 위해 오시지 않는다. 성령의 열매가 꼭 본인들이 원하는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축복의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고 믿는 것은 그릇된 신앙이다(기복신앙이라고 치자!).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돈이나 건강, 자녀의 행복일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세운 기준이나 기대에 성령이 부응하리라고 믿는 것은 잘못되어도 대단히 잘못된 무분별이고, 성령의 남용이다. 우리가 분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우리 가운데 이뤄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는 대로 하나님의 뜻이 따라올 것이라 믿는다면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우리는 세상 행복을 기대하지만, 주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고난과 시험을 주실 수 있다(이것을 받아들이는 게 믿음이다). 사도 바울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갔지만, 얼마 안 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다(행 16:9-11,23). 그후 예루살렘에 갔을 때에도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지만, 결박과 환란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국 브리스톨에 사는 친구가 동네 식당에 걸려 있는 액자에서 발견한 글을 보내 주었다. “인생은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빗속에서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우리의 분별/믿음의 과정 역시 이러하길 바란다. 폭풍이 그치고 무지개가 뜨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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