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가 죽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따르는 데에서 돌아서지 말고 오직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 돌아서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따르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사무엘상 12:19-25).

오랜만에 일본인 사진작가 오키 모리히로가 출간한 테레사 수녀에 관한 책을 읽었다. 테레사 수녀의 생생한 흑백 사진들을 볼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말년에 그녀는 심장마비 증세로 두 번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병원에 입원해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의료진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위기의 순간이 지나면 병원을 나왔다. 길거리에서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자신만 병원에 누워 치료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그녀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가장 가난한 자로 살았다. 그녀는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 심장박동기를 달고 활동을 계속할 정도로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나는 그녀의 삶이 행복했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삶 한가운데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다. 하지만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제 지금부터 대략 3000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난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넘실대던 요단강이 갈라져 마른 땅이 되는 것을 목격했고, 철옹성이었던 여리고 성이 나팔과 함성 소리에 무너져 내리는 것을 목격했던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지리멸렬해졌다. 가나안 땅을 다 정복하지 못한 채 정착하여 안정을 취하게 된 이스라엘은 더 이상 강력한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니었다.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과 수탈을 당하는 약하디 약한 민족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했다.

그들이 강한 나라가 되려면 강대국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고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다. 세상을 바라보았다. 주변 나라들이 강한 것은 그들에게 위대한 왕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자기들에게도 왕을 세워달라고 사무엘에게 요구하였다. 그들의 주장은 왕이신 하나님을 더 이상 섬기지 않겠다는 불신앙의 선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점을 지적하시고 그들에게 왕이 생기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를 설명하셨다. 사무엘은 열심히 설명했지만 그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사무엘은 왕이신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할 경우에 따르는 비참한 결과를 알려 주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분노하심을 보여 주는 증거로 비가 내리지 않는 추수철에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엄청난 비를 내리게 하였다. 그들은 두려워했지만 주장을 꺾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그들을 버리지 않겠다고 사무엘을 통해 선언하셨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에게 “두려워 말라”면서, 하나님께서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선포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이다(22절).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헌신의 근본적 이유는 바로 자신의 이름에 대한 헌신에 있다. 이스라엘이 그분의 백성이기에 당신의 영광을 위해 자기 백성을 보호하셔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은 것이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시 31:3).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을 인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시 79:9).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거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렘 14:7).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요일 2:12).

이스라엘에 일어난 모든 구원과 도움과 건지심이 모두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행사를 통하여 당신만이 홀로 하나님이시며, 홀로 주이시며, 능하신 일을 행하시는 분임을 선포하신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 행하신다는 것이다. 성경은 그 사실을 반복해서 선포한다. 에스겔서에만 65구절이 넘게 기록되어 있다.

 

이 말에 반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을 자기 자신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을 자기 명예에 급급한, 교만하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이타주의를 귀히 여기며 편협한 이기주의를 경멸한다.

그렇다면 당신의 이름을 위하시고 영광을 구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인간들이 행하면 정죄당할 행동을 하나님은 행하셔도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경배 대상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좀 어려운 표현이지만 그 답은 도덕적 탁월성의 원리에 있다. 가장 가치 있는 것에 가치를 두고 가장 명예로운 것에 명예를 돌려야 한다는 원리다. 그것은 우리의 도덕적 의무이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에서 가장 가치 있는 존재이다. 누구도 여기에 이의를 달 수 없다. 그분의 위엄은 다른 모든 것들을 앞지른다. 그분의 거룩함은 비할 데 없고 그분의 아름다움은 초월적 아름다움이다. 하나님은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훌륭하고 명예로운 분이시다. 우리가 그분을 예배하며, 그분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저자이며 신학자인 제임스 패커는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인 양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잘못인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것은 잘못일 수 없다. 단순히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매사에 자기 영광을 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하나님에게 하나님 되기를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하나님의 존재를 억지로 몰아내는 것보다 더 심한 신성모독은 없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가장 가치 있고 훌륭한 것을 구하고 지키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분이 아니시라면 우리는 그분을 의롭고 선하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의 궁극적 기쁨이 당신의 영광에 있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영광에 비할 수 있는 자는 없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가장 기뻐하지 않으신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테레사 수녀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그녀가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한다는 의료진의 말을 무시하고 한사코 병원에서 나가려고 할 때,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만류했다. 그녀가 살아 있어야만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그녀 자신을 먼저 돌보아야 한다는 거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모든 일의 중심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그녀가 하던 일들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 하실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안 계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 우선하여 당신의 영광을 구해야 하고 당신 자신을 사랑하셔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무엇보다 먼저 당신 자신을 사랑하셔야 하는 분이라면 그분은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일 수 있을까? 존 파이퍼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누리도록 주시는 것 중 그분의 사랑을 가장 잘 입증해 줄 것은 무엇일까? 가능한 답은 하나뿐이다. 그분 자신이다. 그분이 우리의 묵상과 교제에서 자신을 거두신다면 아무리 많은 것을 주실지라도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사랑하시는 일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일이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 심령으로부터 당신의 영광에 대한 찬송을 얻고자 하신다.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의 충만한 기쁨을 구하시기 때문이다. 그 기쁨은 모든 존재 중 가장 위대하신 분이신 그분을 알고 찬양할 때에만 얻을 수 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실 때 우리는 최대의 만족을 누리게 된다. 즉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된다. 거기에 우리의 행복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할 때 그분은 영광을 얻으신다. 우리의 행복과 그분의 영광은 하나이다. 우리의 최고의 선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최고의 선은 그 즐거움의 대상이 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당신을 기뻐하는 우리를 기뻐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복음이라 말씀하신 이유를 알 수 있다. 영광의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영원히 행복해 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 그것이 인간들에게 가장 좋은 소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복음을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테레사 수녀는 그것을 알았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영원히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최고의 행복임을 알았다. 그녀는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을 포기하였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마 25:40). 그녀는 이 말씀을 평생 실천하였다.

3000년 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백성의 도리를 버렸다. 그들은 왕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세상의 왕을 구하였다. 하나님의 평판은 땅에 떨어졌다. 하나님의 영광은 가리어졌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평판과 영광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보아야 한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평판과 영광이 형편없이 추락했다. 올바르지 못한 하나님의 백성들 때문이다.

우리가 오늘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을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분의 평판과 영광을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이 땅에서 가장 가치 있는 삶,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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