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예배 시리즈 (14)

 

하나님을 경외함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를 경외할지어다”(시 33:8).

히브리어에는 평행법이 있어서 본 절의 두려워함은 경외함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기에 존경을 넘어 거룩한 두려움을 느낀다는 의미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출 20:20).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다. 성경의 좋은 예가 출애굽기 34장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은 목이 곧은 백성이어서 함께 가지 아니하시고 사자를 보내 인도한다고 하시자, 모세는 하나님께서 함께 가시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보내지 마시라고 기도한다. 모세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영광 중에 임하시면서, 이름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출 34장). 이름으로 자신의 성품을 계시하신 것이다.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보이시며 그 영광을 드러내셨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5-7)고 선포하실 때, 모세는 땅에 엎드려 하나님을 경외하여 경배했다.

로이드 존스 목사의 저서『부흥』에 미국의 위대한 설교자 조나단 에드워드의 간증이 들어 있다. “1737년 건강을 위해 숲속으로 말을 타고 달려가다가, 말에서 내려 늘 하던 대로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기도하며 걸었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정말 특이하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보았다.  그의 놀랍고 위대하고 충만하고 순결하고 달콤한 은혜와 사랑, 온유하고 겸손한 낮아지심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 그처럼 고요하고 달콤하게 나타난 은혜는 하늘보다 크게 보였다. (...) 내가 판단하기에 거의 한 시간 가량 그러한 일이 계속되었다. 그 시간 내내 나는 눈물의 홍수에 빠져 있었고 흐느껴 울었다. 내 영혼이 텅 비어 기절했고, 먼지 속에 누워 그리스도로 충만해지고, 거룩하고 순전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싶은 격렬한 느낌을 가졌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비춰 주실 때, 그 깊이와 높이를 깨달아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다.

소멸하는 불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히 12: 28-29).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를 받았고, 그 은혜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긴다. “경건함과 두려움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함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의 섬김은 헬라어 ‘라크류온’으로 유대인들이 공적인 예배를 말할 때 쓰는 단어이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이 구절을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예배할지니”라고 번역한다. 또한 하나님께선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기뻐하신다.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시 147:11).

헬라어 성경의 히브리서 12:29에는 ‘왜냐하면’ 이라는 접속사가 있고,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라고 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신 4:24). 이는 우상숭배에 대한 말씀이다. 하나님의 질투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예배하지 않으면 심판이 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말 1:6). 당시에는 하나님을 아버지 혹은 주인이라 부르면서도 공경함이나 두려움이 없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의 예배를 멸시했다. 하나님의 예배를 멸시한 것은 하나님을 멸시한 것이다.

대제사장 아론의 네 아들 중 장자 ‘나답’과 둘째 ‘아비후’는 임의로 준비한 불로 성소에 분향하다 죽었다(레 10:1-2). 사무엘서 2장을 보면,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제사장의 하인들이 가져가도록 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삼상 2:12). 하나님이 진정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기에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이 없고 하나님의 예배를 멸시하여 하나님을 멸시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아비인 엘리 제사장에게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긴다고 말씀하셨다(삼상 2:29).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은 부도덕하고, 다른 사람들의 제물을 착취하고, 지위를 남용했는데도 엘리는 그들을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질투

하나님은 아론의 셋째 아들인‘엘르아살’에게 대제사장 직분을 이어가게 하셨다(민 20:25-28). 이스라엘 백성이 싯딤에서 모압 여인들을 음행하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며 제사에 가담했을 때, 하나님은 진노하셨다. 이 와중에 미디안 여인과 그 여인을 데리고 막사로 들어간 시므리를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따라가 죽인다. 이 사건으로 속죄함을 받아 이스라엘은 소멸되지 않는다.

이후 비느하스 후손들은 대제사장 직분을 이어가는 하나님의 평화의 언약을 받게 된다(민 25:10-13). 비느하스가 하나님께 인정받은 것은, 그가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질투”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민 25:11).

하나님의 질투는 당신의 거룩한 속성들을 보전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열심이시다. 그 열심으로 비느하스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 관계를 보전하려고 했다.

다윗 왕 시대에 언약궤를 성전으로 옮길 임무를 맡은 제사장 명단에서 가장 위에 올랐던 사독과 아비아달은 다윗의 통치 말년에 후임 왕을 놓고 대립했다. 아비아달은 다윗의 넷째 아들인 아도니야 편을 들었다. 아도니야는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왕상 1:5)고 말했다. 하지만 사독은 다윗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었다. 후에 솔로몬은 아비아달을 쫓아내고 제사장 직분에서 파면한다(왕상 2:27).

사무엘상 2:35에서 하나님의 사람은 엘리의 가문을 저주하며 사독에 대해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고 예언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게 된다. 성경은 “주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히 1:9),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잠 8:13)고 말한다. 이를 너무나 잘 아는 사도 바울은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라고 권면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죄를 이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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