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성경 그리고 분별 (13)

하나님을 믿는 믿음 속에서 분별하기로 한 자라면, 우리 신앙의 근본 토대인 성경과 성경 말씀이 우리의 삶의 실재가 되도록 돕는 보혜사 성령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쯤은 이제 이의 없이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시고, 우리 마음에 부어주심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고 물으면 할 말이 없어진다. 성령은 과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별 과정에서 성령의 구체적인 도움과 지시와 인도는 우리의 감정/정서라는 내면의 도구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현실적인 분별에 가장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감정과 감정의 상태라는 말이다. 기분 나쁠 때 의사 결정을 한다고 해보자. 흥분해서 물건을 산다면? 그 결과가 어떨까? 마음이 조급한 상태에서 결정한다면? 반대로 느긋하고 평안할 때 결정한다면? 더 쉽게 말하자면, 감정의 흐름과 상태에 대한 깊은 이해와 민감한 조사가 선행되지 않는 한, 우리의 분별은 이 세상의 분별과 다름없게 된다는 것이다. 숫자 상의 비교? 장단점 파악? 결과/숫자 비교? 효율성 분석?

더 이야기를 나누겠지만 감정 상태에 민감하다고 해서 감정적으로 충동적인 것은 아니다. 이 둘에 대한 경계는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충동은 감정의 근거와 상관없이 표현되는 것이다. 모든 감정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내적 증거를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성령을 받았을 때, 그것이 흔히 말하는 성령 세례 혹은 다른 무엇이라 칭하든 간에, 성령이 우리 안에 충만하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우리의 감정 상태로!” “성령이 우리를 위해, 우리와 함께 분별할 때, 우리가 그의 지시나 인도함에 대해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무엇으로 아는가?” “우리의 감정 상태로!” “우리 안에 성령의 열매는 우선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가?” “우리의 감정으로!”

그러니 우리의 감정을 무시해서는 성령의 유무를 알 수 없고, 성령의 활동을 증거할 수도 없다. 고로 감정을 제외하고 분별할 수 없다. 우리의 감정은 성령이 이끄시는 분별의 고갱이다.

그렇다. 크리스천의 분별의 핵심은 우리의 ‘소중한’ 감정에 있고, 이성은 올바른 감정 파악을 위한 재료로 쓰임 받는다. 이 둘의 순서가 바뀌면 안 된다 엘리자베스 리버트는 영성지도자인 캐슬린 피셔의 말을 인용한다. “감정은 이성의 주변부가 아니고, 감정은 이성과 반대되는 것도 아니고, 사실 감정은 이성의 한 형태이다.”

갈라디아서의 9가지 성령의 열매 중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유일하게 비감정적인 열매는 ‘절제’이다. 크리스천의 분별이나 의사결정에 비감정적인 가치가 가장 중요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리 만무하고, 그를 따라 수많은 순교자들이 제 목숨을 파리 목숨마냥 희생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수많은 성인들이 쓴 회개록이나 고백록을 보라. 그들의 반전적인 삶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작용했기 때문에 가능했고, 거기에는 대단히 ‘감정적인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국의 윌버포스가 죽기까지 50년 동안 의회와 싸워 결국 노예매매 제도를 철폐하는 데 성공한 것은 이성적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25세에 회심하고 목사가 되기로 작정했던 그가 정치인이 된 것은 ‘어메이징 그레이스’로 유명한 존 뉴턴 목사의 권유에 ‘감동 받았기’때문이었다. “나는 주님이 국가를 위해 일하도록 당신을 세웠다고 믿고 있으며 또 그렇게 되길 기대합니다.”

천재 신학자 디트리히 본 회퍼가 미국에서의 보장된 삶을 마다하고 고국인 독일로 돌아가 반나치 활동을 하다가 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하라는 감정적 호소를 무시하지 않은 결과였다. 미국의  인종차별 반대 운동의 시초가 된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가 당시 흑백 칸막이가 존재했던 몽고메리의 버스 안에서 버젓이 백인 전용칸에 앉을 수 있었던 용기도 그녀의 감정적인 폭발에서 나왔다. ‘엠마우스’라는 빈민구호단체를 설립하고 평생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해 온 프랑스의 피에르 신부에게는 불의에 대한 분노가 그의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임마뉘엘 수녀

인도 캘커타에 테레사 수녀가 있었다면, 이집트 카이로에는 엠마뉘엘 수녀가 있었다. 101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그녀가 가난한 자들과 평생을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꺼지지 않는 열정 탓이었다. 그 열정의 근원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었다.

“내가 살았던 곳의 넝마주이들에 대해 사람들은 입을 모아 살인자요, 도둑이요, 마약을 복용하고 파는 자들이라고 했으며, 절대로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을 자들이라고 멸시하는 투로 말했다. 그때 나는 이 불쌍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열정에 찬 ‘선한 수녀’로서 이곳에 왔다. 하지만 오히려 내게 복음을 전해준 사람들은 바로 그들, 그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사랑의 신비에 대해 눈뜨게 해주었다.”
이미 성경에서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어떻게 감정을 경험하고, 어떻게 감정을 통해 하나님께 다가갔는지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감정에 민감하지 못하도록 훈련받아 왔다. 신학자이자 영적 분별력의 대가인 엘리자베스 리버트 자신도 감정을 영성의 중심부로 가져오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고백한다.

“감정이 영성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데 한참이나 걸렸다. ‘위험한’ 감정들은 누르고, ‘긍정적인’ 감정들만 격려할 수 있다고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나쁜’ 느낌들을 계속 부정하려고 하면 ‘좋은’ 것들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우는 것이 쉽지 않았다. (...) 다행히 나를 힘들게 했던 감정들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결정을 눈앞에 두고 끙끙대고 있을 때, 우리의 마음 안에는 이미 수많은 감정들이 활동하면서 우리에게 분별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음에도, 그런 감정들을 무시하고 닫아버리고 우리 밖으로 내쫓아 버리고 도리어 세상 밖의 현상/정보/시세에만 눈을 돌리고 있지는 않은가? 이 모습을 성령이 보고 계시다면 얼마나 웃길까?

“내가 왔어, 너를 위해 내가 네 안에 있어! 제발 나에게 반응 좀 해! 마음만 열어! 그러면 돼! 나머지는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하면 돼! 믿어봐, 제발!” 주변에서 성령이 남용되었다고 해서, 성령이 주관적인 활동이라고 해서 성령 자체의 출입을 통째로 막아선 안 된다. 이는 믿음의 가장 큰 적인 성령의 교통 방해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성령이 살아 움직이게 해야 한다. 어떻게? 성령께서 주시는 감정에 우리가 민감하게 반응하면 된다. 이것을 ‘영적인 감수성’이라고 한다.

크리스천의 분별이 세상의 의사 결정과 다른 점은 가장 비과학적으로 보이는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감정을 분별의 재료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분별의 미스터리’라고 부르고 싶다. 수많은 감정을 어떻게 정의하고 다루느냐, 그 감정들을 어떻게 육화해 내느냐가 분별의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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