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시간표에 의해 진행되고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창세기 22:3).

시편 46:10은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고 말합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나님인 줄 알아라.”라고 좀 더 쉽게 말합니다. 간단하지만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우리 입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소리가 그칠 날이 없습니다. 그런데 잠시 멈추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정말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신 줄 알고 있습니까? 그렇게 믿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태도의 변화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힘든 일을 해내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가만히 있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보고 느끼고 깨달아야 할 것들을 놓칩니다.

“너무 빨리 달리면 길가의 좋은 경치를 보지 못한다. 당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확하게 아는 것이 길을 잃는 첩경일 수 있다. 하는 일 없이 어슬렁거린다고 해서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공감 가는 글입니다. 모든 사람이 달려가는데 가만히 멈추어 서서 달리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일은 견디기 어려운 일입니다. 달리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타산지석입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는 조급한 사람의 입장에서 견디기 힘든 괴로움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눈앞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이해하기보다는 이면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태도로의 변화야말로 신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을 향해 출발합니다. 그의 발걸음은 휘청거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정신을 놓아버리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약속의 아들이요,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힘들어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뿐일까요?

그동안 아브라함은 대단한 믿음을 보이는가 하면 어느새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도덕적인 사람처럼 보이는가 하면 어느새 받아들이기 어려운 행동을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한 가지 일관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상속자에 대한 일관된 조바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을 하셨음에도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무려 세 번이나 자기 마음대로 상속자를 정했습니다. 세 번이나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문제의 원인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인간적 생각과 방법으로 이삭이 아닌 다른 사람을 법적 상속자로 삼으려는 시도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첫 번째로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상속자로 생각하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창 13:5-11).

메소포타미아 법에 따르면, 자식 없는 사람은 적당한 사람을 상속자로 입양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셨지만 그 약속이 오랜 세월이 경과한 후에도 성취되지 않자 그는 조카인 롯을 자신의 상속자로 여겼습니다.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 간에 목초지를 둘러싼 분쟁이 생겼을 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땅을 줄 테니 마음대로 정하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관대한 제안을 한 것은 아브라함이 재물에 대해 초연하고 도량이 넓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롯을 상속자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엉뚱한 결과가 발생합니다. 아브라함은 분명 좌측이냐 우측이냐를 물었습니다. 좌측은 북쪽이고 우측은 남쪽이었습니다. 그런데 롯은 북쪽도 남쪽도 아닌 동쪽을 선택했습니다. 그 땅은 약속의 땅 바깥에 있는, 요단 강 건너편 소돔과 고모라 지역이었습니다. 롯 스스로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의 주인이 될 가능성을 포기한 셈이고 그것으로 첫 번째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고 이루어 나가시는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청지기 엘리에셀을 상속인으로 삼으려 하면서 발생합니다. 롯이 떠나가자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을 자신의 상속자로 삼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청합니다(창 15:2-3). 이 또한 메소포타미아 법에 의한 것으로 자식이 없는 경우, 믿을 수 있는 노예를 양자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밤하늘의 별을 세어보게 하시며 그만큼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두 번째 문제는 하나님의 의해 해결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자신의 후사에 집착하고 있는 아브라함을 매우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세 번째 문제는 사라의 여종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로 인한 것입니다. 사라의 여종을 씨받이로 삼아 아들을 낳은 것도 메소포타미아 풍습에 따른 것입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헌을 보면 아내가 자식을 낳지 못할 경우 아내의 몸종을 취해 자식을 낳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아브라함의 상속자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육정으로 태어난 자식이지 하나님의 계획으로 난 아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기에 믿음의 조상이라 부르는 아브라함이 세 번씩이나 그릇된 판단을 한 것일까요? 그것은 조급함 때문이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에 얽매인 피조물인 인간의 한계 때문이었습니다. 조급함을 절대로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핵심 또한 이 조급함에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원인은 자신의 간절한 바람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심중을 헤아리기보다는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하나님의 뜻으로 강요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나에게 선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 것, 그것이 우리의 마음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급하면 기도원 가고, 적당히 기도한 후 자신의 결정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러한 때 자신의 원의가 기도에 투사되어 결국 무의미한 기도가 되고 맙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통해 보듯이 인간적인 해결은 하나님으로부터 거절을 당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십니다.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추어 일하십니다.

창세기 22:3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추어 천신만고 끝에 얻은 약속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 가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상속자에 관한 집착까지 내려놓고 순종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그의 인생을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모리아 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그의 인생이 끝나지 않았으며 아직 절정에 이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러할 것입니다.

일관성 없이 살아온 아브라함에게 이제 하나님 중심의 믿음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조급성도, 자신의 바람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하는 마음도 더 이상 아브라함을 흔들지 못합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얻은 약속의 아들을 통해 하나님의 시간표를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아브라함에게 부활의 소망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하나님의 시간표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반드시 하나님의 시간표에 의해 진행되고 이루어집니다. 조급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윽박질러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우리의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하나님 백성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시작하신 일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브라함과 같이 나의 모든 원의와 집착을 내려놓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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