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고통을 모리아 산의 경험으로 받아들이고 내려놓음과 떠남을 연습한다면"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창세기 22:19).

모리아 사건은 아브라함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떠남과 놓음을 통해 우리를 성장시킨다.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의 집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해, 아버지로서 아들 이삭을 떠나보내며 순례 여정을 마치기까지 계속 떠나야 했던 것처럼, 우리의 순례여정에서도 떠남과 놓음을 체험하면서 크고 작은 모리아 산을 걷게 된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그의 책 『인생수업』에서 인생을 '상실의 삶'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적절한 표현이다. 우리는 순례여정을 하면서 계속 소중한 무엇인가를 상실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출석해야 하는 신앙 학교에서 '상실과 이별'은 필수과목이다. 상실과 이별을 통해 우리는 믿음을 단련하고 영적으로 성장하며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유일한 존재임을 고백하는 일치의 경지로 나아간다. 상실과 이별의 아픔과 슬픔을 경험하지만, 상실과 이별이 신앙 학교의 필수 요소이기에 여호와 이레 하나님을 믿으면서 내적 평화와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크고 작은 모리아 산은 상실과 이별을 통해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시련을 통해서도 온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당한 시련이 하나님이 아닌 악한 인간한테서 온 것이라 해도 그것을 모리아 산의 경험으로 받아들였다.

기원전 2세기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의 유대교 탄압 정책 앞에서 일곱 아들을 가진 한 어머니는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순교했다. 일곱 아들 역시 순교했다. 순교한 그 어머니는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외쳤다고 전해진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여, 당신이 모리아 산에서 아들을 바쳤다고 하지만 내 앞에서 자랑하지 마시오. 당신은 아들 하나 바쳤지만 나는 나의 모리아 산에서 아들 일곱을 바쳤소."

유대인들의 그러한 믿음은 수천 년이 지난 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세계 제2차 대전 중 많은 유대인들이 집단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죽었는데, 이 유대인 대학살은 '홀로코스트'라 불린다. '홀로코스트'란 단어는 번제물을 가리키는 히브리 단어 '올라'에서 유래했다. 유대인들은 나치가 저지른 대학살을 번제라 부르면서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바친 일에 자신들의 고난을 연결시켰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교훈을 얻는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것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따라 나의 크고 작은 모리아 산 체험이 완성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 수용소 학살이 나치에 의해 저질러졌음에도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함으로써 고통의 의미를 찾았듯이 말이다.

인생은 어렵다. 인생이 어려운 것은 그 안에 고통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고통은 우리를 좌절시키고 인생을 견딜 수 없게 한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에게 고통은 선의 도구이다. 우리의 나태한 심령과 안일한 영혼을 쪼개고 가다듬어 빛나는 인생, 빛나는 영혼으로 만드는 도구이다. 만일 우리에게 시험이 온다면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증가시키고 우리 자신과 이웃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타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고통을 거절하고 회피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말로는 십자가를 진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작은 고통도 감내하지 못하는 부족한 인내심으로는 우리의 영혼을 갈고 닦을 수 없다.

오늘날 왜 그리 많은 사람들이 타락하고, 조급하고 거친가? 인생의 고통을 맛보지 못하고 고통을 회피하기 때문이다. 고통을 이겨낸 자만이 진정한 신앙인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삭은 무엇일까? 하나님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 최고로 여기는 것, 그래서 그분이 요구하실 때 내놓기 힘든 것은 무엇일까? 자녀, 사업, 학위, 재산, 명예, 권력, 에고 등, 그것은 사람과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과 우리의 일치를 방해할 때, 그것은 우리의 이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브라함처럼 우리 역시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어야 한다. 그 무엇이라도 하나님 앞에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이삭은 우리의 잘못된 태도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우리 것이라 여기는 것 자체가 그릇된 태도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이삭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린다'는 말도 틀린 말이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것이었지만 지금은 우리의 것이란 표현이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것은 없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모두 청지기다. 청지기는 주인이 맡긴 것을 자기 것이라고 움켜쥘 수 없다. 청지기는 주인이 맡긴 것을 잘 관리하다가 때가 되면 돌려드려야 한다. 우리는 선한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청지기임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이루어 놓은 것을 자신의 것이라 여긴다. 그것은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무시하는 반역이다.

이 시대의 선지자라 불리는 A. W. 토저는 이렇게 말한다. "형제, 자매들이여, 여러분에게 소중한 것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에 칼을 꽂아서 죽여라. 그것과 함께 죽어라. 그러면 하나님이 그것과 당신을 다시 살리실 것이며, 여러분에게 돌려주실 것이다. 하지만 그때부터 그것은 더 이상 여러분 안에 있지 않고 여러분 밖에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여러분 안에 있을 때에는 여러분의 마음이 짓눌렸겠지만 지금은 여러분 밖에 있기에 여러분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움켜쥐고 집착하는 한 우리의 인생은 자유로울 수 없다. 토저의 표현이 잔인해 보이지만 우리는 그것에 칼을 꽂아 죽여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사슬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과 함께 참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모리아 산을 우리의 죽음과 관련해 생각해 보자. 누구나 한 번 치러야 하는 시험은 죽음이다. 죽음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동안 귀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내려놓는 자리다.

하지만 모리아 산 사건과 연결해서 볼 때 죽음은 엄청난 축복의 자리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과 사랑의 일치를 이루고 생명의 후손을 약속받았던 것처럼, 우리도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사랑의 일치를 이루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죽음에 관해 가장 많은 연구를 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우리가 죽기 전에 반드시 배워야 할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왔던 곳, 곧 천국으로 되돌아가기 전에 배워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조건 없는 사랑이다. 이것을 배우고 실행했다면 그는 인생의 모든 교과 과정을 훌륭하게 마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생의 모든 과정을 훌륭하게 마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 아버지의 조건 없는 사랑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기 위한 하나님 백성의 마땅한 도리일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죽음의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만난다는 믿음에 도달하는 것이다.

인생에 닥치는 모든 고통을 모리아 산의 경험으로 받아들이고 매번 내려놓음과 떠남을 연습한다면, 어느 순간 우리는 모리아 산 정상에서 사랑이신 하나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삶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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