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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리번거리는 나
최태선 목사  |  어지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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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1.14  04: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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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8-12).

창세기 22장의 모리아 사건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신 사건입니다. 하지만 이삭 또한 믿음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사건의 전말을 충분히 알 수 있는 나이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태도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삭이 보여준 믿음의 용단은 참으로 훌륭했습니다. 아버지는 3일이라는 시간 동안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지만, 이삭에겐 그럴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의 팔을 움켜쥐고 묶을 때 그는 즉시 희생제물이 되는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요?

아버지 아브라함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이삭의 믿음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순전히 아버지가 알고 있는 하나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의심 없이 믿었기에 아버지가 믿는 하나님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은 결코 개인 신앙일 수 없습니다.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 나라를 전제로 합니다. 공동체 신앙을 전제로 한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삶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결국 삶을 물려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이 신실하지 않았다면 이삭이 순종할 리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믿음에 기반을 둔 신실한 관계가 아니었다면 이삭은 저항했을 것입니다.

이삭은 전적으로 아버지 아브라함을 신뢰했습니다. 그 신뢰의 밑바닥에는 신뢰할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삶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죽음에 직면한 아들을 흔들리지 않도록 잡아주었던 아버지의 말의 무게는 바로 아버지 자신의 흔들림 없는 삶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삭 또한 아버지 아브라함이 믿는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에는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하나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 신뢰는 개인의 신앙이 흔들릴 때에도 개인의 흔들림을 붙잡아 줄 것이며 대대로 이어질 것입니다.

교부들은 모리아 산에서 이삭이 제물로 바쳐진 사건을 '이삭의 희생제사'라고 불렀습니다. 교부들이 그렇게 부른 것은 이삭의 자발적인 희생제물 됨을 골고다 언덕의 예수님께서 스스로 십자가 제물이 되신 사건의 예표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표란 구약시대 일어난 어떤 사건이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되는 구원 사업을 미리 알려 준다는 말입니다.

이삭의 희생제사를 예수님 십자가 사건의 예표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첫째, 예수님이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독자이신 것처럼 이삭도 독자였다는 점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몸소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가셨던 것처럼 이삭도 장작을 등에 지고 모리아 산을 향해 올라갔다는 점입니다. 셋째,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발적으로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처럼 이삭도 아버지 아브라함의 뜻에 따라 자발적으로 묶여 제단에 누웠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공통점에 근거해 교부들은 '이삭의 희생제사'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예표라고 했지만, 실상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삭은 모리아 산에서 죽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에서 죽으셨습니다. 또한 이삭은 모리아 산 정상에 오르기 전까지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몰랐던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의 길이 아버지 뜻임을 아시고 그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자발적으로 목숨을 바쳤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모리아 산이 어디에 있을까요? 역대하에 따르면 모리아 산은 예루살렘입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대하 3:1).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희생제물이 되어 돌아가신 그 예루살렘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 학자인 폰 라드는 모리아 산을 구약성경의 골고다라고 봅니다.

모리아 산은 지리적으로만 존재하는 산이 아닙니다. 모리아 산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존재합니다. 모리아 산의 이삭의 희생제사는 우리 인생의 나침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창세기 22장 12절에서 하나님은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찌르지 않았는데도 찌른 것으로 간주하여 '아끼지 아니하였으니"라고 하십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경외'라는 말로 아브라함의 순종을 칭찬하십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드렸던 경외는 하나님이 무엇을 명하시든 기꺼이 순종하는 자세를 가리킵니다. 경외는 순종의 다른 표현입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라는 말은 '네가 하나님을 순종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뭔가를 알고 싶어서 또는 당신 자신을 위해서 인간을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시험하시는 것은 시험받는 인간과 그 혜택을 받을 인간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은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우리에게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믿음의 행위를 보신 후에 '이제야 내가 알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그가 온전히 순종하는 것을 보시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음을 공인해 주시고 우리에게는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음을 공인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은 순전히 아브라함의 믿음을 완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시험에 통과하자, 그가 믿음의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축하해 주시며 정식으로 그가 믿음의 조상임을 공인하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도 '이제 내가 알도록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이제 내가 알았다'로 번역되었지만 '이제 내가 알도록 하였다'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담고 있습니다. 본래 히브리어는 모음 없이 자음으로만 기록됩니다. 그래서 같은 단어라도 어떤 모음을 붙여서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발음도 의미도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라는 단어에 모음을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야훼'로 읽기도 하고 '여호와'로 읽는 것도 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12절의 '알다'라는 동사에 모음을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아브라함에게는 '이제 내가 알았다'로 선포되고(야다티), 우리에게는 '이제 내가 알도록 하였다'(이다티)로 선포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러셨듯이 우리에게도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칭찬하고 싶어 하십니다. 시험을 당할 때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용단을 내려 희생적 행동을 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이제 내가 알았다.'라는 칭찬을 들으려면 신앙의 용단이 따르는 희생적 행동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는 건 믿음의 용단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일상적인 일들에서부터 믿음의 용단을 내려 희생적 행동을 쌓아갈 때 힘든 일에서도 믿음의 용단을 내리게 되고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는 칭찬의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행위를 통해 성장합니다. 행하지 않으면 믿음도 사라질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칼을 들어 찔러야 하는 시점에 도달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두리번거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을 선의 도구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능력에는 어떤 함정이나 제한도 없음을 믿는다면서 여전히 두리번거리고 있습니다.

고대 기독교 전설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자기 영혼을 포기했던 그곳에서, 그분은 곧장 지옥으로 내려가 고통 속에 있던 죄인들을 모두 풀어주셨습니다. 그러자 악마는 더 이상 지옥에 올 죄인들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눈물을 흘리면서 통곡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악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울지 마라. 자신들의 선을 의식하면서 자기만족에 빠져 있고 죄인들을 저주하면서 자기 의에 빠져 있는 거룩한 사람들을 보내마. 그러면 지옥은 몇 세대 지나지 않아 죄인들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모리아 산을 올라가 모든 것을 준비해 놓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맙시다. 사도 바울과 같이 오로지 앞에 있는 푯대를 바라보면서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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