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창세기 22:13-14).

아브라함의 여행은 진실한 믿음의 표본이다. 이는 미지의 땅, 모호한 미래를 향한 여행이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히 11:8).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은 확실하고 안전한 땅을 떠나, 자신들의 결정을 뒷받침하거나 미래를 보장하는 합리적 설명 없이 사막으로 들어간다는 데 있다. 왜 그렇게 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이 여행을 지시하고 거기에 약속을 덧붙이시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러한 메시지는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한다. 사람들은 통제가능하고 예측 가능한 것을 선호한다. 예배조차 스스로 점수를 매기고, 예배의 소비자가 되어 자신의 기호를 충족시키는 길을 걸음으로써,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예배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것은 진정한 예배가 아니며 진정한 자기사랑도 아니다. 창세기 22:13-14은 진정한 예배가 무엇이며 진정한 자기사랑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는 구절은 성경에 처음 나오는 대속적 죽음에 관한 구절이다. 대속적 죽음이란 누군가를 대신하여 속죄의 제물이 되어 죽은 것으로,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아브라함은 수풀에 숫양이 걸려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섭리하셨다고 본다. 그래서 숫양을 잡아 번제를 드린 후, 하나님의 섭리가 모리아 산에서 이루어졌음을 공표하기 위해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다. "여호와 이레"를 직역하면 '여호와께서 마련해 주실 것이다.'라는 뜻이다.

만일 아브라함이 제사를 드리지 않고 산을 내려갔다면 모리아 사건은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린 명령이 온전히 수행되려면 제사로 끝이 나야 한다. 비록 시험은 '내가 이제야 알았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끝났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린 명령은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린 명령의 마지막 말은 '번제물로 바치라'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바라신 것은 절대적 순종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말 받고 싶으셨던 것은 하나님께 대한 아브라함의 감사와 기쁨이었다. 만일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쳤다면 그의 마음이 과연 감사와 기쁨으로 넘칠 수 있었을까?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독자 이삭을 죽이기는 했겠지만 그의 마음은 매우 슬펐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이는 줄만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숫양 한 마리를 마련해 주셔서 아들 대신 번제물로 바치게 하신 것을 기념하여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다. 아브라함의 공적인 신앙고백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내가 이제야 알았다.'라고 하신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정식으로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음을 자각한다. 이제 아브라함은 세상을 향해 '여호와 이레'를 외치며 자신의 소명을 수행하고 있다. 다시 말해 열국의 아비된 자이자 믿음의 조상으로서, 자신을 아비로 삼게 될 모든 믿음의 후손들을 향하여 '여호와 이레'를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라 부르기 전에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분명 그의 마음은 감사와 기쁨으로 넘쳤겠지만 그러한 감정을 발설하지 않았다. 믿음의 조상으로서 공적인 차원에서 후손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 이레'가 우리에게 주어진 공식 선언이라는 점은 이 단어가 미래형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만일 이것이 개인적인 신앙 고백이었다면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었다."라고 과거형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미래형을 사용했다. 아브라함뿐 아니라 믿음의 후손인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라는 의미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 이레'를 선포했는데, '여호와 이레'는 사실 처음 선포한 말이 아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번제물로 바칠 어린 양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자 아브라함은 '엘로힘 이레'라고 말했다. "아들이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는 히브리어로 '엘로힘 이레'이다. '엘로힘 이레'나 '여호와 이레'는 같은 의미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실 것이다.'라는 의미다.

모리아 산을 오르면서 '엘로힘 이레'라고는 했지만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실지 모르고 있었다. 다만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알아서 마련해 주실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산 위에서 숫양을 제물로 바친 다음 고백한 '여호와 이레'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확실히 경험하고 난 후 공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엘로힘 이레'가 개인적 차원에서의 신앙고백이었다면 '여호와 이레'는 공적인 고백인 셈이다.

아브라함의 '엘로힘 이레'라는 첫 번째 신앙고백이 '여호와 이레'라는 두 번째 고백으로 바뀌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이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삶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열국의 아비', '복의 근원'이란 칭호를 받았는데, 이는 사명을 위해서였다. '열국의 아비'라는 말은 '너는 이제부터 열국의 아비, 즉 만민의 조상으로 살아갈 것이다.'라는 사명을 주는 말씀이다. '복의 근원'이란 말씀도 '너는 이제부터 복의 근원, 즉 복의 통로가 될 사람으로서 살아갈 것이다.'라는 뜻이다. '열국의 아비', '복의 근원'은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그러한 존재로 키우실 것이라는 약속이요. 아브라함이 그러한 존재가 되기 위해 성장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에게 그러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당신 종으로 부르실 때 영광스러운 칭호를 주시면서 사명의 길로 초대하신다. 기드온에겐 '큰 용사'라 하셨고, 시몬 베드로에겐 '반석'이라 하셨다. 기드온과 시몬 베드로 역시 처음부터 칭호에 맞는 품성이나 능력을 갖춘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신 것이다.

아브라함과 기드온과 베드로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당신의 사람으로 부르신다. 우리의 부족한 모습을 상관하지 않으시고 위대한 사명을 부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어야 한다. 자신에 대한 부정적 시선과 세상의 잣대로 자신을 평가하는 바보짓을 그만두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목숨과 맞바꿀 정도로 소중한 존재인 나. 영원한 생명을 가진 나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를 깨닫는 것이 참된 믿음이요 희망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식하는 사람은 자녀답게 살려고 애를 쓰며 점점 더 그 신분에 걸맞은 사람이 된다. 진정한 자기 사랑은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부여하신 특별한 신분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그 신분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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