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창 25:19-28).

인간의 욕망은 바로 그의 운명이다. 욕망은 다름 아닌 의지이기 때문이다. 의지는 곧 행위이고, 행위가 곧 결과이다. 결과가 좋든 나쁘든 인간은 욕망에 따라서 행동한다.

야곱은 자신의 욕망대로, 자신의 의지대로 운명을 만들어 간 사람이다. 좋게 말하면 강한 집념이, 나쁘게 말하면 세상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그의 삶을 만들었다. 그의 삶은 장자권에 대한 집념, 라헬을 향한 집념,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집념으로 점철되었다.

이 집념 때문에 야곱은 불의의 인간으로 보인다. 형의 배고픔을 이용해 장자권을 사들이고, 눈먼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받아내고, 교묘한 방법으로 장인과 계약을 맺어 재산을 증식시키고, 귀향길에 형을 대면하기까지 잔머리를 굴리고, 특별한 영적 체험을 통해 이스라엘로 거듭난 뒤에도 여전히 하나님보다 자신을 의지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하시면서 서서히 당신의 뜻을 드러내셨다.

21절에서 보듯 이삭은 결혼하고 나서 20년 동안 자식이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이삭의 간구를 들어주시어 리브가는 쌍둥이를 임십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두 아들이 어머니의 태에서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성경은 자주 형제 간의 갈등과 시기와 다툼을 그린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야곱과에서, 요셉과 그의 형제들이 그랬다. 특히 쌍둥이 형제 야곱과 에서는 어머니의 태속에서부터 발길질을 해대며 싸울 만큼 숙명적인 라이벌 관계를 형성한다.

출산이 다가오자 둘의 싸움은 더욱 치열해진다. 서로 먼저 세상에 나가겠다고 상대를 밀친다. 여기서 '싸우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라차츠'는 거칠고 잔인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두개골을 부수다'(삿 9:53) 또는 '갈대를 찢다'(사 36:6) 등으로 번역된 동사이다.

리브가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하나님께 나아가 고통을 호소할 정도이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견디다 못한 리브가는 하나님께 물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23).

하나님은 "두 아이가 들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두 국민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둘 중 하나만 계약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 백성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에 의해 이미 한 민족이 결정되었다면 다른 민족은 어떤 노력을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예정론은 인간 개개인의 구원과 멸망이 하나님에 의해 영원 전부터 결정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선택하시는 것은 배타적으로 그 사람만 축복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선택은 편애와 다르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선택하신 것은 열둘만 편애하셨기 때문이 아니다. 베드로를 수제자로 삼으신 것 또한 베드로를 편애하셨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 역사 안에서 당신의 구원 계획을 좀 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알리기 위해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을 표본으로 뽑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면, 선택된 자는 구원의 도구가 되듯이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하신 것은 그를 구원의 도구로 삼아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을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24-26절에는 야곱과 에서의 마지막 싸움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힘이 약한 야곱은 에서가 먼저 나가지 못하도록 막다가 그의 발꿈치를 잡은 채 두 번째로 세상에 나온다. 가부장 중심의 사회에서는 출생이 운명의 분기점이었다. 집안의 모든 재물과 권한이 장남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이삭이 에서만 불러 축복을 주겠다고 약속한 사실과 야곱이 에서인 줄 알고 야곱에게 준 축복, 야곱에게 아버지의 축복을 빼앗기고 울부짖던 에서에게 이삭이 마지못해 빌어준 축복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야곱의 정확한 발음은 '야아코브'인데 히브리어로 발꿈치가 '야케브'이다. 글자도 비슷하고 발음도 비슷하다. 야곱은 발꿈치를 움켜잡고 태어났다. 야곱은 열심히 싸웠지만 인생의 첫 번째 관문에서 패배했다.

쌍둥이는 자라면서 뚜렷하게 다른 양상을 보인다. 에서는 힘이 셌다. 붉은 살색에 온 몸에 털이 나있었다. 그는 들판을 뛰어다니는 사냥꾼이 되었다. 반면 야곱은 살결이 매끄럽고 차분한 성격이었다. 그는 에서와 달리 집 안에 거하기를 좋아했다.

장막은 어머니의 영역이고, 들판은 아버지의 영역이다. 장막에 머문다는 것은 어머니의 영향력 밑에서 있는 것이고, 들에서 보낸다는 것은 아버지의 영향력 밑에 있다는 것이다. 야곱은 유약하거나 조용해서 장막에 머문 것이 아니다.

야곱은 강인한 사람이었다. 하란 땅 우물가에서 돌로 된 우물 뚜껑을 혼자 굴려낼 만큼 힘이 셌다. 20년 양치기 생활 동안 사막의 폭염과 추위를 견뎌낼 만큼 강인했다. 얍복 강가에서 만난 힘센 남자와 씨름을 할 만큼 강인했다.

고로 야곱이 장막에 머문 이유를 가족 관계 안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버지 이삭이 장남인 에서만 편애하자 야곱은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장막에 머물렀을 것이다. 성경은 이삭이 에서를 편애한 이유를 분명히 밝힌다. 에서가 사냥해서 갖다 주는 고기에 맛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브가가 야곱을 편애한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

창세기 25:28 말씀에서 이삭과 리브가가 저지른 심각한 잘못을 알 수 있다. 부모가 각각 다른 자식을 편애하며 그 자식만 잘 되기를 바라고 있다. 부모의 편애는 자녀들 간에 갈등을 빚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다음 세대에까지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편애는 편애를 낳는다.

야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쌍둥이 차남으로 태어나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갖고 살았던 야곱은 장남을 사랑하지 않고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을 편애한다. 그러한 야곱의 편애는 다른 아들들의 시기심과 분노를 일으켜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팔아넘기는 비극을 야기한다.

게다가 부부 사이에 편애하는 자식이 다르다는 것은 부부 사이가 소원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부부 간에 사랑이 식으면 그 사랑은 자식에게 집중되게 마련이다.

야곱 가정의 이야기를 통해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무엇보다 건강한 가정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친밀한 부부 관계, 부모의 공평한 자식 사랑 그리고 형제간의 진정한 우애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만 생각한다면 움켜쥔 손을 펴고, 집착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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