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년 전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기억하자."

 

미국 프로농구의 전설적인 스타 코비 브라이언트(41세)가 1월 26일, 헬리콥터 추락사고로 딸 기아나(13세)와 함께 목숨을 잃었다.

스포츠 세계가 이  비극에 주목하고 있는 동안 세계는 또 다른 비극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월 27일은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의 날이다. 유엔 총회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 수감자 석방의 날인 1월 27일을 기념일로 제정하는 결의안을 2005년 채택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에서 110만 명의 남녀노소 수감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찌 정권이 운영한 4만 개 넘는 구금 시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유대인은 세계 인구의 0.2%에 불과하다. 이렇듯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애굽의 노예로 시작해(출 1:12-15)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동안 조직적인 박해와 억압의 희생양이 되어 왔다.

유엔은 기념일에 6백만 유대인 희생자를 추모할 뿐 아니라, 장래의 인종청소를을 막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라고 회원국들에게 촉구했다.

그런 맥락에서 질문을 하고 싶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을 증오하는가? 세 가지 요인을 생각해 본다.

창세기 26장에는 이삭이 블레섹 사람들과 갈등하는 장면이 나온다. 분쟁의 핵심은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시기”하였다는 것이다(창 26:14). 그 결과 블레셋 사람들은 아브라함 때에 종이 판 모든 우물들을 막았으며, 이삭에게 떠날 것을 종용했다(창 26:15-16).

그때부터 지금까지 유대인에 대한 질투심은 반유대주의의 요인이 되었다.

유대인들의 토라 사랑과 자녀 교육 열정은(신명기 6:4-7)은 수세기에 걸쳐 사업과 상업에서 성공을 가져왔다. 가족과 전통과 가치에 대한 헌신은 시기와 장소를 막론하고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유대인들이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게 해주었다.

오늘날 미국 내 유대인 세대 중 44%의 연간 수입이 10만 불을 넘는다. 이는 미국 평균 수입보다 50% 더 많은 액수이다. 유대인은 미국 인구의 2.1%에 불과한데도 노벨상 수상자의 37%를 차지했다.

질투는 반유대주의의 두 번째 요소인 유대인의 독창성과 성공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온다.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두려워했다(출 1:10). 유대인을 비난한 이들은 나치가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었다. 에굽인들부터 아시리아인, 바빌로니아인, 페르시아인, 로마인, 무슬림과 영국인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제국들은 자신들의 종교와 당대의 주류 문화 가치와의 타협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에게 불만을 품었다(에스더 3:8 참고).

역사적인 반유대주의의 배후에 있는 세 번째 요인은 탐욕이다. 유대인들이 성취한 것들을 훔치고자 하는 욕망이다.

하만은 “아달월 십삼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젊은이 늙은이 어린이 여인들을 막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는 명령을 페르시아 각 지방에 하달했다(에스더 3:13).

나치가 빼앗은 물건들은 2만5천 점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는 그 수가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일례로 루브르 박물관은 올해 초 나치가 유대인 변호사로부터 압수한 10개의 미술품들이 1942년 경매에서 팔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필자는 이전에 하나님이 사랑하시듯 우리도 유대인을 사랑할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구원을 모색하자고 촉구한 바 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과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한 이스라엘 국가를 지지할 필요가 있다고도 말했다. 오늘은 반문화적 용기를 언급하고자 한다.

수많은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의 중보와 선교에 반대한다. 미국인 다수는 이스라엘 국가에 반대한다. 유대인들과 그들의 국가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려면 우리의 문화에 저항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주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있던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을 되새겨 보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여호수아 1:9). 그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과 그분이 선택한 백성을 섬기려면 신앙에서 비롯된 용기가 필요하다.

비톨드 필레츠키의 용기를 생각해 보자. 필레츠키는 아우슈비츠에 자원 입소하여 그곳에서 저항 운동을 시작한 폴란드의 독립 운동가였다. 그는 아우슈비츠의 잔혹함을 인내하며, 수천 명의 수감자들과 지하 조직을 만들었다. 그들은 음식과 의복을 훔쳐서 수감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치의 계획을 방해하고, 부상자와 병자를 숨겼다.

강제수용소의 존재를 외부에 알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필레츠키는 탈옥하여 바르샤바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가 목격한 내용을 기록했다. 훗날에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반대하는 폴란드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다가, 1947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 편집자 주 - 문화사역자 짐 데니슨 박사의 1월 27일 칼럼 일부 번역)

 

1월 27일, 교황 프란치스코는 "우리가 기억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미래를 파괴하는 것이다. 75년 전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기억하자. 무관심해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이 일을 해야 한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참고로, 아우슈비츠 강제 이송이 최초로 이루어진 날은 1940년 6월 14일이며, 강제 이송된 사람들은 폴란드 정치범이었다. 폴란드 내 독일 점령지역에서 폴란드인들이 대거 체포되면서 기존 감옥에 자리가 부족해졌기 때문에, 이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내라는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2년 후, 아우슈비츠는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 실행 거점 중 한 군데가 되었다. 이는 독일 점령지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말살시키려는 나치의 계획이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에서는 살해된 이들 대부분은 유대인이자 폴란드 시민이었다. 유럽의 여러 도시와 시골의 길거리, 게토에서도 처형이 이루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약 6백만 명의 유대인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은 소련군이 폴란드에 입성한 후 1945년 1월 27일에 해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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