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차갑고 맑은 공기를 마시고 걷기 운동을 하면서 유튜브를 통해 설교 말씀을 듣는 것으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  육과 영을 동시에 훈련한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상쾌하다.  주로 몇 년 전에 은퇴한 팀 켈러 목사의 말씀을 경청한다.  이분은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인생의 의미를 알아야 하고, 어느 정도의 만족감을 누려야 하며, 확실한 정체성, 소망 그리고 자유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글에서는 정체성의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오랜 세월 전통적인 정체성에 대한 개념이 인간사회를 지배했다. 즉 일개인이 속한 가정, 단체, 사회 등 공동체가 요구하고 기대하는, 즉 외부로부터 개인에게 주어진 정체성에 자기를 맞추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 왔다.

이와 반대로 근대의 서구 문명에서는 자기의 정체성을 스스로 결정하고, 오히려 주위의 환경이 자기의 정체성을 수용하고 거기에 맞추어 주기를 바라는, 다시 말해 개인의 내부에서 밖으로 영향을 끼치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이 두 가지를 비교해 볼 때,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진정한 자기의 정체성을 깨달을 수 없고, 반면 근대적 접근 방식으로는 실제로 많은 경우에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갈등이 생길 수 있다.  더 나아가 인간은 관계를 맺는 사회적 존재인데 홀로 정체성을 결정한다면 주위 사람들과 끊임없는 마찰을 빚을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이해타산을 기준으로 하는 인간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점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정체성을 논할 때 꼭 생각하는 성경의 인물은 사도 바울이다.  그가 쓴 성경의 많은 서신들 중에서, 데살로니가 전후서만 제외한 나머지 서신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라는 확실한 자기 소개로 시작되고 있다.  남다른 학문도, 빼어난 경력도, 출중한 가문도 본인의 정체성에 전혀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가 누구인지 대한 위대한 고백으로 스승에게 칭찬을 받았고, 자기만은 결코 예수를 배반하지 않고 스승을 위해 목숨까지도 내놓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결국 저주까지 하면서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생긴 것일까?  베드로는 아마도 자기의 정체성을 예수의 수제자라는 신분, 자기의 용감성, 그리고 자기가 고백하는 예수에 대한 사랑에 근거를 두지 않았을까라고 켈러 목사는 말한다.  이와는 반대로, 베드로를 포함해 모든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내주는 예수의 사랑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다면, 베드로가 예수를 그렇게 부인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켈러 목사는 주장한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와 좌절과 낙망 가운데 헤맸을 베드로를 찾아와서 사명을 주며 용서와 사랑을 보여 주었을 때, 베드로는 비로소 순교의 자리에까지 나아갈 수 있는 충성된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을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하며 그리스도인의 신분으로 살아간다.  과연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정체성은 무엇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의 믿음 생활에서도 능력이나 성취가 결코 자기의 정체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능력 있고 중요한 인물인가에 대한 인식보다는,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얼마 만큼 인식하면서 살아가는지가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정체성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겠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을 대하며, 과연 이러한 사랑을 받은 자로서 흔들림 없는 정체성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하나님 앞에서 거짓없이 나 자신을 돌아보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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