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론 (3)

성령론 공부 세 번째 시간에는 지난 시간에 이어 “성령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께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시고, 믿음 주시는 일을 행하심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사랑의 영, 소망의 영, 교회의 영이 되시는 성령의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랑의 영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 중의 하나는 사랑하게 하는 일입니다. 유기성 목사는 성령이 우리에게 찾아오면 “사랑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난다고 강조합니다. 억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사랑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랑은 성령이 일하시는 방법이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때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듀크에서 가르치는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윌리엄 윌리몬 교수가 쓴 『성령』이라는 책에는 한 미국교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앨라배마 주에 있는 한 작은 교회가 자신들이 세 들어 있는 예배당을 벗어나서 자체 건물을 짓기 위해서 10년 동안 저축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교인 중에서 네 명의 아이들을 위탁받아 기르고 있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교회의 예배 시간에 기도 제목을 나누는데, 이 부부는 지역의 사회복지과에서 세 명의 아이들을 더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면서 더 큰 집의 임대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이 많은 한 교인이 불쑥 일어서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일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의 건축 기금을 그 부부에게 주도록 합시다.” 이 말을 듣고 교인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 교회는 10년 동안 모은 건축 기금으로 일곱 명의 아이들을 돌보는 그 가정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도록 해주었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까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께서 사랑하게 하는 역사를 일으키신 것입니다. 성령은 사랑하게 하는 영이고, 우리는 사랑할 때 사랑의 영인 성령으로 더욱 충만해집니다.

소망의 영

성령은 또한 “소망의 영”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새로운 일을 하십니다. 성령을 의미하는 “루아흐”는 숨이라고도 하고, 바람이라고도 합니다. 요한복음 3:8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성령을 루아흐, 바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람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우어워스와 윌리몬 교수는 이것을 “성령의 거칠고 예측 불가능한 특징”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은 바람처럼 거칠고 예측 불가능한 모습으로 일하십니다.

사도행전에도 성령의 예측 불가능한 일들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8:26에 보면, 성령께서 이끄셔서 빌립이 광야로 가게 됩니다. 왜 성령이 빌립을 광야로 몰아가시나 했더니, 광야에서 에디오피아 내시가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준비된 사람을 만나게 하시려고 빌립을 광야로 데려간 것입니다. 에디오피아 선교의 길은 이렇게 열립니다.

사도행전 16:6을 보면 바울이 아시아로 전도 여행 가려는 것을 성령께서 막으십니다. 성령께서는 유럽으로 방향을 트십니다. 바울의 전도 여행이 그리스를 거쳐 유럽의 중심으로 향하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이 장면이 나오는 사도행전 16:7에는 바울의 여행길을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라고 말합니다. 성령께서는 하나의 문을 닫으시고, 새로운 문을 여십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성령께서 하시는 예측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에서 바람같이 일하십니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바람처럼 우리의 삶에서 기대하지 못한 새로운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 우리에게는 소망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예측 불가능한 역사가 우리에게는 소망이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우리의 막힌 삶에 바람처럼 새로운 일을 열어가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거대한 성령께서 일하고 계십니다. 새로운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루아흐가 불어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언제나 새로움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며 나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교회의 영

마지막으로 성령의 일하심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교회의 영”이심을 빼놓지 않아야 합니다. 성령은 교회에서 일하시는 분입니다. 성령을 교회의 영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성령의 역사를 교회 안에만 가두어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성령을 교회 안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성령은 창조 때부터 일하신 생명의 영이고, 온 세상과 만물을 회복시키는 회복의 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교회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은 주님이 승천하신 후에 성령이 가장 먼저 임하신 장소가 교회이고, 성령이 가장 분명하게 일하시는 곳 또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성령의 역사를 가장 분명하고, 명백하게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성령께서 교회에 임재하신다는 의미에서 성령을 교회의 영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교회는 성령이 주인 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령이 바람같이, 불같이 임합니다. 마치 태풍 허리케인이 온 집안을 강타하는 듯한 모습이고, 거대한 불이 일어나 집안 전체를 삼키는 듯한 이미지입니다. 하지만 집이 날아가지 않고, 사람이 상하지 않는, 다른 차원의 바람과 불입니다. 이 성령이 임하는 이야기에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메시지는 성령이 교회에 임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교회에 임하면서 교회를 인도해가는 주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성령 하나님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주인 되는 교회가 건강하고 올바른 교회입니다.

한국의 김동호 목사가 높은뜻숭의교회를 개척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석 달 만에 1천 명의 사람들이 몰려와서 교회 장소의 문제를 겪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 앞에 나온 건물을 사려고 은행에 대출을 신청했는데, 두 번이나 거절을 당합니다. 김 목사는 어의가 없어서 은행을 찾아가 왜 대출을 두 번이나 거부했는지 물어봅니다. 은행 직원은 교회가 신용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교회는 “김동호 목사 교회”이기 때문에 신용이 없다는 거였습니다. 그러면서 은행 직원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를 개척한 지 석 달 만에 1천 명이 넘게 모였지만 김동호 목사라는 한 사람을 보고 모였기 때문입니다. 김 목사 한 사람이 잘못 되면 교회가 하루 아침에 무너질 수 있으니, 신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김동호 목사는 무릎을 쳤다고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야 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이 주인 된 교회가 되었구나.’ 김 목사가 은행 직원에게 "당신의 말에 감동을 받고 크게 깨달았다."라고 말하니까, 은행 직원은 자기 말에 감동 받았다는 김 목사의 말에 감동해서 대출을 허락해 주었다고 합니다.

교회는 성령 하나님이 주인 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건강해지는 길은 교회의 주인 되시는 성령님께 뜻을 맞추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목회가 쉬워집니다. 성령의 생각에 맞추려고 하면 모든 일이 쉬워집니다. 교회는 교회의 영인 “성령의 능력에 사로 잡힌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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