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과 분별 3

 

기독교 역사에서 이런 지혜, 즉 의사결정 과정에서 마음의 평화와 기쁨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미 2천년 전에 몸소 체득한 자가 있다. 사도 바울이다. 뼛속까지 성령주의자였던 그는 무슨 일을 하든지, 심지어 감옥에 갇혀도, 마음에 평화와 기쁨을 유지했다. 이 두 감정은 그의 모든 판단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롬 14:17)이라는 것을 알았다. 

고린도후서 2:12-13에 사례가 하나 나오는데, 그의 화려했던 전체 사역에 비해 쉽게 지나칠 수 있는 내용이다. 이런 경우에도 그는 마음 가는 대로 결정하지 않는다. 성령이 주시는 마음으로 판단한다. 그는 대단히 ‘욱’하는 성격을 가졌지만, 반대로 대단히 예민한 감수성도 가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울과 동행하고 있던 누가나 디모데나 실라는 어땠을까? 이들의 감정은?

그가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그에게 이미 주 안에서의 문은 열렸다. 문이 열렸다는 것은 주님께서 기회를 주셨다는 것이다. 드로아는 바울이 꿈꾸는 아시아로 가는 관문이고 고대 트로이의 옛터가 있는 곳이다. 하지만 동역자 디도가 없어 ‘마음이 편하지’ 않아 마게도냐로 갔다고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문을 열어 주셨다고 해서, 어떤 특정한 사인을 보여 주셨다고 해서, 무조건 응답을 받았다고 쉽게 단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 마음의 ‘흡족함’이라는 감정적 도구로 확인하라는 것이다. 이 흡족함은 마음의 평화와 기쁨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크리스천의 분별에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감정은 ‘평화와 기쁨’이다. 크리스천의 분별에 대해 오랜 기간 고민해온 내가 깨달은 가장 귀한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성령이 주시는 내적 ‘평화’와 ‘기쁨’이 우리의 의사결정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안 것이다. 이런 깨달음의 순간 이후의 나와 내 가정의 의사결정의 순간에는 항상 이 두 말이 등장하게 됐다. “지금 너의 마음은 어때?” “우리 마음에 평화와 기쁨이 있을 때, 그리고 가족 구성원 모두 같은 마음일 때 결정해!” 

지금까지 내가 말한 다른 것은 다 잊어도 이것만은 잊지 않기를 바란다. 크리스천은 마음에 평화와 기쁨이 있을 ‘때에만’ 결정한다는 것. 

왜? 이때가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시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어떤 의사결정을 하는데 하나님의 영이 아닌 다른 나쁜 영의 지시대로 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라! 섬뜩하지 않은가? 나쁜 영의 지시대로 움직인 풍채 화려했던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의 최후를 생각해 보라!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한 영과 악한 영을 둘 다 경험한 자다. 하나님이 악한 영을 보내실 수 있는가는 욥의 하나님과 더불어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지만, 그렇다고 인간들이 이 두 영을 구분 없이 받아들이라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지’라는 선물을 주시지 않았던가? 사울은 이 두 영을 분간하지 못했다. 그의 마음에는 평화가 없어지고, 불안과 질투로 가득 차게 되고, 결국에는 파멸한다. 

분별의 가장 결정적인 기준은 경영의 대차대조표가 아니라, 우리, 나아가 모든 공동체 구성원의 일치된 평화와 기쁨이다. 이것은 분별에서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이다. 돌아보라! 이전에 해왔던, 아니면 방금 전에 결정했던 그 일에 대해서. 무엇을 기준으로 결정했는가? 누구의 목소리가 커서 결정했는가? 그렇다면 목소리가 작은 사람의 심정이 어땠을까를 고민해 보았는가? 지금까지 내가 해온 수많은 결정들이 다른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주면서까지 해온 것이라면, 이것은 옳은 것인가? 내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여 만들어 온 결정들의 결과는 어땠는가? 

지금 당신의 자녀는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다. 부모는 수입이 적다. 이 아이는 아주 우수하다. 자신에 대해서 욕심도 많다. 미국으로 진학하고 싶어한다. 엄마는 찬성한다.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이다. 아버지는 반대한다. 이 아이를 공부시키려면 그나마 모아둔 재산을 처분해야 한다. 문제는 이 아이 밑에 동생이 두 명 더 있다는 것이다. 이 가정은 조만간 결정할 것이다. 누군가의 의견대로 결정될 것이다. 누군가는 마지못해 양보할 것이다. 하지만 이 양보가 ‘마음의 흡족함’에서 나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각자의 길을 갈 것이다. 이런 결정의 최종 결과는 어떨까?

교회라고 다른가? 중요한 결정을 한다, 건물을 짓는다, 이전을 한다, 목사를 청빙한다, 누구를 해임한다, 뭐를 한다 등등의 결정 과정에서 교인들의 의견과 감정을 물어본 적 있는가? 교인들의 마음 속에 성령은 어떤 마음을 주셨는지? 마음이 기뻤는지, 기분 나빴는지, 불쾌했는지, 슬펐는지 등등. 다같이 모여 기도를 하든 성경 묵상을 하든, 나누든 배우든, 성령이 주시는 감정에 대해 나눠본 적이 있는가? 교인들의 감정과 의견이 의사결정에 반영된 적 있었는가? 결국 어떤 기준으로 의사를 결정했는가? 

성령이 우리와 함께 역사하실 때 가장 확실하고 일차적인 증거는 우리 마음에 평화와 기쁨의 감정이 솟구치는 것이다. 주님을 영접했을 때의 감정을 생각해 보라! 그 첫사랑의 감정을! 어떤 의사결정을 하든 이것을 확인하라는 것이다. 그런 다음 구체적인 것들을 나눠도 늦지 않다. 구체적인 진행상황들은 전자에 비해 덜 중요하다. 혹 구체적인 것들에 대한 불일치로 인해 마음의 평화와 기쁨 가운데 이미 결정한 것을 번복하지 마라. 그러면 산으로 배가 올라가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들의 믿음은 참 이율배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그 믿음의 결과로 생겨나는 마음의 평화와 기쁨은 경시한다. 하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정작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의 평화에는 무관심하다. 하나님의 일, 교회 일은 열심히 하는데도 정작 마음에 평화와 기쁨이 없다면?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의 믿음은 어떤 종류의 믿음인가? 차디찬 머리 속에 가둬 놓은 믿음? 누군가에 의해 강제된 믿음? 

마음의 평화와 기쁨의 원천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혜사로 보내신 성령이 우리와 함께 일하시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에 평화와 기쁨이 있어야 한다. 성령은 우리 마음이 혼란하고, 시끄럽고, 불안정하고, 미적지근할 때 방문하시지 않는다. 여기서 잊지 말 것은, 단지 우리의 편의를 위해서 이런 감정들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받고,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한 평화와 기쁨은 거짓 평화요, 거짓 기쁨이다. 순수하지 않은 동기를 갖고 하나님의 평화와 기쁨을 요청하는 것은 죄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자에게 평화와 기쁨이라는 감정들을 주실 리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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