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9:1-20

야곱은 하란에 도착하자마자 우물가로 갑니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우물가로 갔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고대 사회에서 우물은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우물은 사람들과 짐승들의 목을 축이는 자리였습니다. 광야 백성이나 유목민들에게 있어 우물은 생명을 보존하는 원천 그 자체였습니다.

또한 고대 사회의 우물은 친분을 맺는 만남의 자리였습니다. 삶의 활력소를 채우는 자리였습니다. 고대 사회의 우물은 청춘 남녀가 짝을 맺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성경은 여러 차례 우물가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 약혼과 결혼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9:1-20도 대표적인 예입니다.

야곱이 하란 땅 우물가에 이르렀을 때 한 무리의 목자들을 만납니다. 야곱은 양치기들과 인사를 나누며 라반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마침 그때 라반의 딸 라헬이 양을 몰고 오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들어 라헬을 본 야곱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습니다. 성경은 야곱의 마음에 대해 분명히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맥을 통해 짐작해 보면, 이종사촌 라헬을 보고 몹시 흥분했으며 자신의 아내가 될 것을 확신한 게 분명합니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운명이 하란 땅 우물가에서 결정된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는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보낸 늙은 종 엘리에셀을 우물가에서 만나 아버지 이삭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있는 곳이 바로 그 우물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무려 세 번이나 '그의 어머니'를 언급하며, 이 우물이 바로 그 우물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라헬의 갑작스러운 출현을 우연으로 넘길 수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운명적인 만남이었습니다. 야곱은 마음이 설레어 라헬과 둘이 있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보는 목자들에게 “빨리 가서 양들에게 풀을 뜯겨야 할 것이 아닙니까?”라고 말합니다.

목자들은 느닷없는 야곱의 힐책에 우물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우물 사용과 관련된 규정 때문임을 밝힙니다. 양떼가 다 모인 후 돌을 옮기고 한꺼번에 물을 먹이는 것이 규정이었던 것입니다. 물을 아끼기 위해 일정한 숫자의 목자들이 모였을 때 우물의 돌 뚜껑을 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라헬이 도착하자마자 야곱은 대뜸 우물가로 내려가 돌을 치웠습니다(10).

게다가 야곱은 라헬의 양떼에게 물을 먹인 뒤, 라헬에게 입을 맞추고 큰 소리로 울어 버립니다(11). 그가 얼마나 감격하고 있었는지는 대뜸 라헬에게 입을 맞춘 그의 행위에서 드러납니다. 사실 라헬은 야곱이 누구인지 아직 모릅니다. 야곱의 행동이 지나치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야곱이 라헬을 만났을 때 어떤 감정이 들었을까요? 안도감과 기쁨으로 울음이 터졌을 것입니다.

이제 라헬에게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은 라헬을 "곱고 아리따우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원문대로 옮기면 "몸매도 아름답고 용모도 예쁜"이라 번역할 수 있습니다. 아가서를 제외하고, 성경이 인간의 외모나 성적 매력에 대한 표현을 삼가고 있음을 고려할 때, 라헬의 미모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파격적입니다.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가 이삭에게 구혼을 받았을 때는 이미 아브라함의 종에게서 온갖 좋은 선물을 받은 다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라헬은 야곱에게서 구혼을 받았을 때 아무것도 받지 못했습니다. 자발적 봉사와 영원한 사랑만이 야곱이 라헬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었습니다. 라헬은 야곱의 사랑을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성경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 표현에 인색합니다. "이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외쳤던 아담과 이브 이야기에는 사랑이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우에도 아브라함이 사라를 사랑했다는 표현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삭의 경우, 리브가를 사랑했다는 표현이 나오지만, 이삭이 장가를 가고 난 다음입니다. 반면 야곱과 라헬이 서로 사랑했다는 표현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옵니다.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 년을 수일같이 여겼더라." 성경이 기록할 만큼 대단한 사랑이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야곱과 라헬의 사랑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라헬의 아버지 라반 때문이었습니다. 라반은 교활하고 탐욕스런 인물입니다. 나그네에게 호의를 베풀 만큼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친절을 베푼다면 거기에는 그만큼의 이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라반은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찾아왔을 때, 그 종이 가지고 온 선물부터 점검한 인물입니다(창 24:30).

탐욕스러운 라반이 부잣집으로 시집간 누이의 아들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흥분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그는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 맞추고 자기 집으로 인도했습니다(13).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남루한 차림의 야곱을 보고 선물을 가득 실은 낙타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자 야곱에게서 기대할 것이 없음을 알아챕니다.

그리 된 사연을 야곱에게 들은 라반은 야곱을 향해 "너는 참으로 나의 골육이로다"(14)라고 말합니다. 외로움에 지친 야곱의 심리상태를 이용한 발언입니다. 라반은 자기 딸 라헬을 향한 야곱의 사랑까지 이용해 야곱을 종으로 부려 먹었습니다.

사실 라헬을 위한 봉사 기간을 7년이라 제시한 이는 라반이 아니라 야곱이었습니다. 야곱은 무엇 때문에 긴 세월을 제시했을까요? 그는 사랑하는 라헬을 아내로 삼기 위하여 라반이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던 것입니다. 그는 7년 동안의 머슴살이를 기쁘게 해냈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 년을 수일같이 여겼더라"(20).

야곱의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식어버리는 열병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사랑은 지속적인 참사랑이었습니다. 성경이 보여 주는 가장 헌신적인 사랑이었습니다. 나아가 그의 사랑은 순결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도덕적 순결을 보존하면서 무려 7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견뎠습니다. 그는 남녀 간의 참된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성경의 인물입니다.

라헬을 향한 야곱의 사랑은 라헬이 죽은 후에도 계속됩니다. 야곱은 라헬과 사별한 이후 어떤 여자도 옆에 두지 않았습니다. 임종 직전 요셉에게 축복을 내릴 때에도 라헬에 대한 변함없는 그리움으로 추억 여행을 떠납니다.

그를 축복하는 내용 중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 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창 49:25). 이 축복문에서 언급되는 젖과 태는 일반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비옥한 땅이나 단비 혹은 풍요로운 곡물이 아니라 라헬을 가리킵니다. 야곱은 요셉을 축복하면서 요셉을 어머니 라헬의 한 부분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라헬을 향한 야곱의 사랑은 영원했습니다.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 박사는 그의 책 『의미를 찾는 인간』에서 강제수용소의 수많은 유태인들 중 극소수만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으로 버텼다고 증언했습니다. "사랑이야말로 인간 실존의 최후의 것이며 최고의 것이다. 비록 지상에 아무것도 남지 않아도,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마음을 바침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다."라고 프랭클 교수는 말합니다. 야곱은 바로 이런 사랑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야곱처럼 자기 목숨이 다할 때까지 서로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집념의 사람 야곱은 라헬을 그렇게 사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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