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라반이 그 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저녁에 그의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라반이 또 그의 여종 실바를 그의 딸 레아에게 시녀로 주었더라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 라반이 이르되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 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 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라반이 또 그의 여종 빌하를 그의 딸 라헬에게 주어 시녀가 되게 하매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여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더라”(창세기 29:21-30).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리로다" (시 126:6).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 6:7).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두게 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을 다 속일 수 있어도 단 한 분 하나님만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격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음의 동기까지 바르고 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라헬과 결혼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던 야곱은 7년 세월을 다 채운 뒤 라반에게 달려가 외칩니다.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21). 야곱은 라반에게 '둘째 딸' 혹은 '라헬'을 달라고 청하지 않습니다. 아내를 달라고 청합니다. 유다의 풍습에 의하면, 약혼 기간 동안 두 남녀는 함께 살지는 않아도 법적으로 부부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의 히브리어 본문을 직역하면 "저는 그녀와 함께 눕겠습니다."입니다. 단도직입적인 표현입니다. 이 말은 그들이 순결을 지켰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라반은 야곱에게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은 채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풉니다(22). 첫날밤을 보내고 아침이 되어서야 야곱은 자기 옆에 누워 있는 신부가 라헬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어둠 속에서 뜨거운 사랑을 나눈 여인이 레아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눈먼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축복을 받아낸 야곱이 이제는 자신이 눈먼 자가 된 것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났습니다.

신학자 포클만은 다음과 같은 수사학적 표현을 써서 야곱의 비극적 체험을 묘사합니다. "창세기 27장에서는 눈먼 아버지 앞에서 두 형제의 순서가 속임수로 바뀌었는데, 29장에서는 어두운 방과 신부의 너울로 인해 눈 먼 야곱 앞에서 속임수로 두 자매가 바뀐다."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라반은 밤늦게 거의 의식을 잃은 야곱을 라헬이 아닌 다른 딸이 기다리고 있던 신방으로 인도하였다. 포도주와 어두움에 의해서 흐리멍텅한 분별력을 갖고 있던 야곱은 라헬과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야곱이 술에 만취한 이유 외에 결정적인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레아는 자신이 라헬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레아는 아버지 라반에게서 지시를 받았을 것입니다. 7년 전 야곱이 어머니 리브가의 지시를 받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아침에 눈을 뜬 후 모든 사실을 알았을 때 야곱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야곱이 라반에게 달려가 소리를 지릅니다.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봉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찜이니이까?" (25)

라반은 야곱의 외침에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고 담담한 어조로 말합니다. "형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26). 라반은 이미 벌어질 상황을 알고 있었습니다. 라반이 야곱을 속인 것입니다. 자기 지방 풍습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이 7년 동안 공짜 노동력을 착취한 것입니다. 그리고 7년 전에 이미 준비했던 말을 침착하게 내뱉습니다. "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그를 위하여 또 칠 년을 내게 봉사할지니라" (27).

결혼식 기간이 일주일이었습니다. 그 일주일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작은 딸도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칠 년간을 더 일하라는 것입니다. 라반은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었습니다. 

옛날에는 딸을 시집보내는 것이 큰 골칫거리였습니다. 탈무드에서는 딸 가진 아비의 마음을 이렇게 보여 줍니다. "딸이란 아버지에게 있어서 허망한 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딸 걱정에 아버지는 밤에도 잠을 이룰 수 없다. 어렸을 때에는 유괴당할까 염려하고, 나이가 들면 타락할까 봐 걱정한다. 결혼 적령기에는 남편을 찾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 고민하며, 결혼하면 아이를 낳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나이가 들면 요술을 배울까 봐 염려한다."

성경은 레아가 안력이 부족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7). 안력이 부족하다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습니다. 사팔뜨기 아니면 지독한 근시였다고 볼 수도 있고, '멍청하게 보이는 눈'으로 해석하면 정신지체 장애인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라반은 한 번에 두 딸을 시집보내 시집 보낼 걱정도 덜고 결혼 비용도 절약했습니다. 참으로 지독한 아버지, 지독한 외삼촌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왜 라반의 말에 입을 다물었을까요? 그의 말이 뼈 있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너희 지방에서는 아우가 형의 장자권을 빼앗을 수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 지방에서는 그럴 수 없다."면서 야곱을 비웃고 있는 것입니다.

할 말을 잃은 야곱에게 라반은 선심을 베푸는 척합니다. "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그를 위하여 또 칠 년을 내게 봉사할지니라." 여기서 '그'라라고 번역된 말의 히브리어는 '작은딸'입니다. 7년이란 기간 또한 흥미롭습니다. 7년은 야곱이 스스로 제시한 기간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난 것입니다.

라반의 제안대로 야곱은 또 다시 7년간의 머슴살이를 합니다. 사랑에 대한 야곱의 집념이 아름답습니다.

이제 시선을 레아에게 돌려봅시다. 류폴드 같은 학자는 레아를 비판합니다. "레아가 만일 고결하고 정숙한 여성이었다면 부친의 심한 억지를 무릅쓰고서라도 그 사실을 야곱에게 알려야 했다... 자기 부친보다 죄책이 가볍다 해도 사기극을 완강히 반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녀가 죄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결국 레아는 야곱의 진정한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녀의 태를 축복해 주셔서 아들을 넷이나 낳았지만, 그녀는 동생 라헬의 뒷전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녀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인 데 팥 난다'는 격언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 새롭게 다가듭니다. 심은 대로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롬 8:5)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과연 육신의 일을 생각할까요? 영의 일을 생각할까요? 우리가 육신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지만 먼저 영의 일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납니다. 우리는 오늘 무엇을 심고 있을까요? 무엇을 심든, 심은 대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생명의 씨를 심어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거둘 것입니다. 기쁨의 단을 거둘 것입니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