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성경 그리고 분별 (16)

분별에서 가장 중요한 감정: 평화와 기쁨 2

우리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유지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이기보다 주님의 명령이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요 14:27). 

이때에만 주님이 평화에 대해 말씀하셨을까? 아니다. 주님에게는 평화가 늘 따라다닌다(주님은 평화 그 자체이시다). 마가복음 4:36-41 말씀을 보자. 예수님과 제자들이 바다 가운데 있었을 때, 거센 바람이 불고 풍랑이 쳐 배에 물이 가득찼다. 예수님이 자신들을 죽게 할까 봐 제자들은 두려웠다. 예수님을 깨웠다. 일어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킹 제임스 버전이 적절하게 표현해 준 대로, “Peace, be still, 즉 평화가 있을 지어다”였다. 

주님은 평화를 명령하셨고, 바람과 바다조차 그의 명령에 순종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바울도 예수를 본받아 골로새 교회에게 동일한 명령을 반복한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이 평화를 누리도록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골3:15, 새번역). 

중세 가톨릭 영성가였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1567~1622)는 ‘평화의 왕자’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회개할 때조차 평화롭게 하라”고 조언한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우리가 취사선택할 수 있는 성격의 평화가 아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이고, 어떤 조건이나 사족을 붙일 수 없는 평화이다. 우리는 무슨 일이 하든지,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살레시오와 제인 샹탈의 공저 『살레시오와 제인의 영적 지도 편지들』에는 이런 글이 있다. 

“우리는 종종 고통을 받기 때문에 평화를 잃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잃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고통 받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자신을 포기하기를 계속하며 의무들을 수행하는 데 충실하다면 우리는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 어느 곳에서나 평화롭게 살아야 합니다. 내외적인 문제들이 우리에게 다가온다면, 그것들을 평화롭게 받아들이십시오. 만일 기쁨이 온다면 그것을 평화롭게 받아들이고 흥분하지 맙시다. 우리가 피해야 할 악이 있다면 걱정하지 말고 평화롭게 피하도록 합시다. (...)우리가 평화롭지 않다면, 우리의 적이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는 시간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좋은 일이 있다면 그것을 평화롭게 하도록 합시다. 그러면 마음의 비통함이 사라지고 평화가 옵니다.”

마음의 평화와 함께 움직이는 기쁨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께서 도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다”(요  15:11)고. 바울은 회의와 미신과 두려움과 잔인함과 어두움이 가득차 있는 1세기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빌립보 교회를 향해, 그것도 세 번씩이나 연이어 “기뻐하라”고 권면한다.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3:1, 4:4).

스코틀랜드 신학자이자 목사인 H. R. 맥킨토시는 『그리스도인의 메시지의 원천』에서‘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은 그 당시에 대단히 비상식적인 일이었다고 말한다. 당시 예수님은 어떤 주이셨나? 고통의 주이셨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주이셨다.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 당하고 죽은 죄인에 불과했다. 그런 주와 함께 기뻐하라는 것은, 곧 고통 가운데 기뻐하라는 것으로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주문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크리스천들은 부활의 주님을 믿기에 기뻐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죄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용서되고 화해되었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상전이나 하인 모두 환영받는 공동체가 있었기에 기뻐할 수 있었다.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었다. 그런즉 심한 내홍을 겪고 있는 로마 교회를 향한 바울의 권면은 기쁨일 수밖에 없었다.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모든 기쁨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여러분에게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롬 15:13).
이런 기쁨은 마음에 드는 물건을 구입해서 느끼는 세속적인 기쁨과는 차원이 다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대로 이런 기쁨은 “영적인 근원에서 나오는 기쁨이며,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그분의 온전한 뜻 이외의 다른 것을 선택하고 싶지 않은 상태에서 오는 기쁨”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11).

우리 마음에 평화와 기쁨의 감정이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솟아나는 것이 바로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에 역사하신다는 증거이다. 성령은 거침없이, 조건없이 오신다. 우리 마음에 한없는 감정 세례를 주신다. “마음의 평화와 기쁨 그리고 감사의 눈물.” 우리는 이런 경험을 하게 되면서 더욱 더 영적으로 열리고, 감수성이 발달하고, 성령과 더 깊은 교제를 하게 된다. 우리의 분별은 이제 더욱 더 자연스러워지고 자유롭게 된다. 우리 안의 성령께서 ‘직접’ 하시기 때문이다.

살레시오의 기도로 마무리하면 좋을 것 같다. 그는 우리들의 ‘상상에서조차’ 불안감과 분노가 인다면 다음과 같이 기도하라고 조언한다. 

“오, 주님, 당신은 저의 하나님이시고 저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당신은 저를 도와 주실 것이고, 저의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것이며, 따라서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저와 같이 계실 뿐 아니라 이미 제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주님 안에 있습니다.”

기도로 부족한가? 그럴 때에는 찬송을 부르자. 나는 아주 큰 소리로 찬양을 한다. 음 이탈을 하든 말든 내 알 바가 아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을 부른다. 이 노래는 미국 시카고의 쟁쟁한 변호사이자 재산가였던 호레이쇼 스패포드(왼쪽 사진)가 전 재산을 시카고 대화재로, 아내를 제외한 네 명의 딸들을 배의 침몰로 잃고 나서 지은 노래이다. 그의 불행에 대해 사람들은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했지만 정작 그는 “It is well with my soul(내 영혼이 평안해)!라고 노래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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