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0:38).

“너는 누구냐 나는 누구냐/ 이 땅에 태어난 우리 모두 신토불이/ 신토불이 신토불이 신토불이야 (중략) 우리 몸엔 우리 건데/ 남의 것을 왜 찾느냐/ 고추장에 된장 김치에 깍두기/ 잊지 마라 잊지 마 너와 나는 한국인/  신토불이 신토불이 신토불이야.”

배일호라는 트로트 가수가 부른 ‘신토불이’의 가사 일부이다. 신토불이(身土不二)의 뜻은 사람과 땅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이다. 자기가 사는 땅에서 산출한 먹거리가 각자의 체질에 가장 잘 맞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해석이 그럴 듯하여 꽤 유행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이 한자어로 된 사자성어이기는 해도 중국에서는 전혀 사용해 본 적 없고, 사용하지 않는 말이라고 한다. 국어사전에도 최근에야 등재된 단어라고 한다.

좀 더 살펴보니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 사용한 일본식 한자어라는 것이다. 국립국어원에서도 이를 인정하는 발표를 한 적이 있다. 1907년 경, 식양회라는 일본의 어느 단체에서 벌인 음식 권장 운동의 독특한 기치가 바로 신토불이였다. 살고 있는 지역의 토지와 계절에 익숙한 각자는 그 토지에서 난 농산물 또는 계절에 따른 음식을 섭취해야 한다는 운동이었다. 불교의 경전에도 등장한다는 이 말을 식양회는 오래도록 자신들의 독자적인 대원칙으로 삼고, 사람들을 계몽하고 선도해 왔다고 한다.

내력을 알고 나니, 신토불이란 사자성어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한자어는 사자성어가 아니라 고사성어이다. 한자의 종주국인 중국의 고사가 깃들어 있는 고사성어나 우리나라의 역사가 배어 있는, 즉 우리나라에서 오래 전에 만들어진 고사성어는 그 뜻을 배움으로 감동도 되고 수양도 되는 데 비해, 그저 글자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사자성어는 대부분 급조되어 경박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좌우지간“사람과 땅은 둘이 아니다”라는 의미는 마음에 들기에 지금 신토불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네 사람을 흙으로 지으셨으니(창 2:7), 흙과 사람이 둘일 수 없다는 의미에서다. 물론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들도 흙으로 지으셨다(창 2:19).
그러니까 땅과 사람들과 들짐승들과 각종 새들, 즉 우리 모두는 신토불이인 셈이다. 그러나 신토불이라는 말은 탐탁치 않으므로신토불이는 이쯤에서 접고, 새로운 사자성어를 만들어서 묵상을 이어가야겠다. 

히브리서 10:38을 묵상하며 생각해낸 새로운 사자성어는 바로 신생불이(信生不二)다. 믿음과 삶은 둘일 수 없다는 의미다. 삶은 있으나 믿음은 없을 수 있다. 그걸 쉽게 말해 불신이라고 한다. 그러나 불신의 삶 즉 믿음이 없는 삶은 온전한 삶이 아니다.

목숨이 붙어 있어 사람이라고는 하나, 믿음이 없다면 그건 죽은 목숨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살아서는 죽은 목숨이요, 죽어서는 영원히 죽음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믿음이 있는 삶의 끝은 영원한 삶으로 이어지는 천국이지만, 믿음이 없는 삶의 끝은 영원한 죽음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죽음으로 순화해 말해서 그렇지 적나라하게 말하면, 그 끝은 지옥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말씀이 성경 몇 군데에 나온다. 간혹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논조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은 맞지만, 위의 구절을 해석하는 데에는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의인 즉 구원 받은 백성은 믿음의 삶, 믿는 자다운 삶을 살리라 혹은 살아야 하리라”고 해석해야 더 적절한 것 같다. 의인은 오직 신생불이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믿음과 삶이 하나이듯 구원과 믿음도 하나요, 구원과 삶도 하나이다. 그러니 그 누구도 섣불리 믿음 따로, 삶 따로를 말할 수 없고, 구원 따로, 믿음 따로, 삶 따로를 논할 수 없다. 믿음으로 구원 받은 백성은 반드시 믿음대로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코로나19의 역경을 섬김의 기회로 삼아 그리스도인으로서 아름다운 삶을 살아내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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