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계준 장로의 생애와 축복

   저는 이때까지 여러 가지 체험했던 일들이 많았지만 저의 할아버님의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할아버님에 대해서는 나의 할머님과 웃어른들과 임이걸 장로님으로부터 들었고, 독립운동사, 기독교사, 기독교사전에 서도 읽었습니다. 임이걸 장로님은 독립 운동가이시고 오랫동안 저의 할아버님을 유장로 형님이라고 부르며 가까이 지내신 분이시며, 독립운동하는 우리 조선인을 심하게 고문하던 일본인 고등계형사를 때려죽여 종신형의 징역형을 받으시고 감옥에 계시다가 해방이 되어 석방되신 분입니다.

 임이걸 장로님은 제가 어릴 때 우리 집에 자주 오셨는데 제가 우리 동네에서 저보다 키와 체격이 큰 아이와 싸움을 하는 장면을 보시고는 저의 아버님께 “정호례 누구를 닮았는가 했더니 바로 자기 할아버지 유장로 형님을 닮았디”라고 말씀 하시곤 했습니다.    

 할아버님은 일찍이 1879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증조 할아버님께서는 부농이셨고 할아버님 은 한학공부를 열심히 하시면서 자라나셨습니다. 그런데 13살 때 증조할아버님께서 돌아가셨고 할아버님의 큰형님은 할아버님보다 10년 정도 연상이셨고 본래는 큰형님과 할아버님 사이에 형님이 또 한분 계셨지만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여 할아버님은 차남이 되셨습니다. 할아버님의 큰형님은 자기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부터 술을 좋아하게 되셨고 그러다보니 재산을 탕진하기 시작 했는데 안동 김씨인 증조할머님께서 여러 해 동안 야단을 치시며 바로 잡으려고 애를 쓰셔도 도저히 큰아들을 바로 잡을 수 없게 되자, 증조할머님께서 더 재산이 탕진되기 전에 논밭의 일부를 팔아 그 돈을 남동생(할아버님의 외숙부)에게 주시면서 "네가 조카에게 사업을 가르치라"고 하여 할아버님은 18살 때 평양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때 할아버님의 외숙부님은 평양에서 큰 무역상을 하고 계셨고, 할아버님은 외숙부님과 함께 일하시면서 사업을 배우고 한학공부를 계속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시다가 몇 해 후에는 할아버님께서 평양 대동문 밖 대동강 변에서 독자적으로 여러 명의 직원을 데리고 사업을 시작 하셨고, 그 사업이 날로 번창하여 진남포에서 중국 산동상, 천진 사이를 왕래하며 소금을 무역하고 시탄.장작 등을 교역하는 큰 선박 10여척을 부리는 대무역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때에 미국 선교사 마포삼열 (Samuel Moffet)이 평양에서 노방 전도를 하고 계셨는데, 이 마포삼열 선교사는 후일 숭실고등학교 전신인 숭실고보, 숭실대학교의 전신인 숭실전문학교, 지금 서울에 있는 장로회 신학대학교의 전신인 평양 신학교를 설립한 분입니다.

 그 당시 할아버님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네 가지로 유명하셨는데, 첫째는 의리가 매우 강하셨고, 둘째는 주먹이 매우 세셨고, 셋째는 돈은 많이 벌어서 돈이 많으셨고, 넷째는 한학을 높은 수준까지 공부하셔서 한학실력이 대단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평양의 많은 청년들이 할아버님을 형님, 형님하면서 따라 다녔고, 할아버님은 친구들과 동생뻘 되는 청년들에게 노방전도를 하는 마포삼열 선교사를 때려서 조선에서 쫓아내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래서 마포삼열 선교사는 심하게 얻어맞게 되었고, 그렇게 얻어맞고도 몇 주일을 치료하고는 또 전도를 계속하자, 이번에는 할아버님 자신이 나서서 심하게 구타하여 마포삼열 선교사는 턱에 큰 흉터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한일합방이 되기 전이었고, 할아버님은 미국이 우리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고 이렇게 선교사를 보내서 민심을 흉흉하게 하므로 일본사람도 내쫓아야하지만 미국인도 내쫓아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나 마포삼열 선교사는 두 달간의 치료를 마치고는 할아버님집을 자주 찾아와서 “형님, 예수 믿으세요”라고 하며 전도를 또 계속하였습니다. <계속>

글쓴이 소개: 유정호 신경과 의원 원장은 유기천 총장기념사업회 이사 겸 미주 총지부장,유 Heritage Foundation 이사장)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