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1:17-54

룻기에서 시어머니 나오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면서 자신을 나오미라 하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고 한다. 떠날 때의 기대와는 달리 아무것도 남지 않고 완전히 텅 비어버린 자신을 가리켜 한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나오미를 채우신다. 안정된 생활을 주시고, 회복의 길을 여시고 이방인 며느리 룻이 메시아의 조상 족보에 올라가는 영광의 자리를 허락하신다.

이처럼 긍정적인 반전 이야기는 성경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일단 하나님께서는 쓰시고자 하는 사람을 철저히 비우신다. 그리고 채우신다. 로마서 8:28이 말씀하는 바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야곱의 이야기도 이러한 반전 이야기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야곱은 라반이 자신의 귀향을 허락해 줄 리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지난 20년 간 자신을 붙잡아 두었던 라반이 순순히 보내 주거나 잘 가라고 축원해 줄 리 없었다. 털 깎는 자리에 초대받지 못한 야곱은 사람 없는 이때를 이용하여 귀향길에 나선다.

처자들을 모두 낙타에 태우고 가축 떼를 몰면서 가나안 땅으로 떠난다. 4명의 아내와 12명의 자녀들이 각기 낙타를 타고 떠날 수 있을 정도로 야곱은 부유해졌다. 그런데 라헬은 떠나면서 아버지 라반이 섬기는 수호신 드라빔을 훔쳤다. 성경은 왜 수호신을 훔쳤는지 설명하지 않고 어떻게 훔쳤는지만 설명한다. 라헬은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간 사이에 그것을 훔쳤다. 어떤 학자들은 이 사실을 놓고 라헬이 우상숭배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에 여행길에 보호를 받고 가나안 땅에서 축복을 받기 위해 아버지 집의 수호신을 훔쳤다고 말한다. 하지만 문맥을 잘 보면 그렇지 않다. 라헬이 우상숭배자라면 어떻게 그것을 훔쳐 엉덩이로 깔고 앉을 수 있겠는가?

수호신 드라빔을 훔친 이유는 복수라고 본다. 드라빔을 훔친 사람이 레아가 아니라 라헬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라헬은 20년 전 아버지가 자신에게 했던 몹쓸 짓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 한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자기에게서 가장 귀중한 사람을 앗아간 아버지가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드라빔을 훔친 것이다.

라반은 사흘이 지나서야 야곱이 식솔들과 가축들을 거느리고 떠난 것은 물론, 집안의 수호신인 드라빔까지 훔쳐갔다는 사실을 알고 추격한다. 단단히 화가 나서 야곱을 잡아 그를 죽여 버리고, 딸들과 손자들과 모든 재산을 몰수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는데 하나님이 개입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꿈을 통해 라반에게 "삼가 야곱에게 선악 간에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래서 라반은 야곱에게 수호신 드라빔만 내놓으라고 한다.

라헬이 드라빔을 훔쳤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야곱은 "외삼촌의 신은 뉘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라고 큰소리 친다. 자칫 라헬을 죽게 만들 수 있는 위태로운 약속이었다.

하지만 라헬은 라반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침착하게 행동한다. 라반이 수호신을 찾아 장막들을 샅샅이 뒤지는 동안, 드라빔을 낙타 안장 속에 넣고 그 위에 앉았다. 그리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한다. "마침 경수가 나므로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사오니 내 주는 노하지 마소서." 당시 사회에서는 생리중인 여인을 부정하게 여겼다. 생리중인 여인은 신상에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 라반은 딸의 거짓말에 멋지게 속아 넘어갔다.

라반이 드라빔을 찾겠다고 야곱의 천막들을 샅샅이 뒤지는 동안, 참고 있었던 야곱은 격렬하게 화를 낸다. 둘러선 사람들에게 둘 사이의 시비를 가려줄 것을 청하면서 항변한다.

"내가 이 이십 년에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 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수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낮에 도적을 맞았든지 밤에 도적을 맞았든지 내가 외삼촌에게 물어내었으며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 내가 외삼촌의 집에 거한 이 이십 년에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년을 외삼촌을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값을 열 번이나 변역하셨으니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공수로 돌려 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였나이다" (v. 38-42).

야곱의 격렬한 항의는 과장 없는 사실이었다. 이 장면은 사실 감동적인 장면이다. 바라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속임수를 썼던 야곱이 라반에게 당당하게 항변하고 있다. 그동안의 삶을 통해 바뀐 야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야곱의 항변에도 노련한 라반은 꿈쩍하지 않는다.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때는 나의 양 떼요. 내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날 내 딸들과 그 낳은 자식들에게 어찌할 수 있으랴?" 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라반은 체면도 살리고 앞날의 안위를 보호하기 위해 협상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이제 오라 너와 내가 언약을 세워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44). 이 언약은 서로 침략하지 말자는 평화조약이었다. 돌무더기를 쌓고 그것을 넘어가 치지 말자는 것이었다.

이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하나님의 세우심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신다. 반드시 그를 세워 주신다. 야곱의 20년은 고난과 아픔의 세월이었다. 하지만 마마보이였던 야곱을 당당한 사나이로 독립시켜 주었으며 약삭빠르고 이기적인 야곱을 정의로운 사람으로 전진하게 하셨다. 물질적으로도 풍요롭게 해주셨다. 그런 후에 하나님께서는 사기꾼 라반과 대항해도 뒤지지 않는 야곱으로 세상에 우뚝 서도록 해주셨다.

둘은 상호불가침 협정을 맺은 뒤 화해의 돌무더기 앞에서 잔치를 벌이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이 장면에서 화해의 세 가지 원리를 배울 수 있다. 첫째, 자신을 존중하고 참된 목소리를 내면서 상대에게 이용당하기를 거부할 때 화해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둘째, 화해에는 때가 있다는 것이다. 무작정 화해를 하자고 나설 수 없다. 화해는 상대방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힘을 가지게 되었을 때 가능하다. 그러므로 때를 기다려야 한다. 나의 말이 상대방에 의해 존중받을 그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셋째, 화해는 용서와 다르다. 화해는 잘못한 편에서 자기 허물을 인정하여 용서를 청하고 피해를 본 쪽에서 그 청을 받아들일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라반은 야곱에게 용서를 구한 적이 없다. 야곱도 라반을 용서한다고 말한 적 없다. 하지만 둘은 공존의 길을 찾아 화해하였다.

이 세 번째 원리는 중요하다. 친밀한 관계가 깨지면서 상처 입고 고통을 겪는 이들이 효과적으로 관계를 회복시키고 싶다면 용서보다는 화해의 길을 찾아야 한다. 갈등 관계에서 용서를 받아내려고 들면 갈등의 골만 깊어질 뿐이다. 또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대를 변화시키겠다는 바람은 비현실적인 바람이다. 상대방을 용서할 수는 없어도 화해할 수는 있다. 이것이 서로 공존할 수 있는 길이다. 그런 다음 용서와 치유를 향해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라반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 신학자 모리스는 라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라반은 속물적이고 탐욕적인 인간의 전형이다. 그는 20년 동안 야곱과 함께하면서 참되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많았던 사람이다. 하나님이 야곱을 통해 그에게 많은 축복을 내려 주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반은 물질적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우상숭배와 탐욕의 삶을 계속해 나갔다. 야곱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진실된 길을 찾기보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내리시는 축복만 질투하며 탐냈다. 그의 삶은 결국 무의미하게 끝났을 것이다."

라반은 나머지 인생도 물질적으로는 잘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그 인생의 무의미함이다. 서로를 위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할 때 우리는 의미있는 존재가 된다.

긍정의 힘이 인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그 영향은 절대적일 수 없다. 마인드 컨트롤로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 그러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 줄 수는 없다. 인생의 결과를 바꿀 수는 더더욱 없다. 진정한 하나님 백성만이 최선의 삶으로 인생을 마감한다. 진정한 긍정, 완벽한 긍정은 하나님 백성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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