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성경 그리고 분별 (17) - 감정과 분별 5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과 더불어 사는 사람의 가장 두드러진 감정이 평화와 기쁨이라는 사실에는 이의를 달 수 없다. 우리들의 지상에서의 분별도 이 두 감정에 근거해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나아가 성경 말씀에서도 확증하거니와,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와 기쁨의 영 가운데 머물러야 한다. 이건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이다.

문제는 이런 평화와 기쁨이 우리 마음속에 항상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카파도치아의 성인과 같이 나무 위에서나 동굴 속에서 수 년을 지낼 정도의 수련이 된, 그러다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사는, 소위 은자나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사자에 물려 죽더라도 성령께서 주시는 희열에 벅차 복음을 소리질러 외치는 그런 종류의 성인이 아니다.

만약 우리 가운데 마음의 평화와 기쁨이 없다면? 그렇다면 분별할 수 없는 것인가? 이건 대단히 현실적인 고민이다. 사실 우리는 시끄러운 세상에 살고 있다(이 글을 쓰는 지금 눈에 보이지도 않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비탄과 통곡의 바다로 몰아넣고 있다). 하다 못해 남들이 고이 자는 새벽, 기도회에 나가도 빠른 박자의 음악을 틀어대고 교회가 떠나가라 소리치지 않는가? 주일 예배라고 다른가? 온갖 최첨단 음향기기들이 총동원되고, 성가대의 우렁찬 합창이 신도들의 기를 죽이고, 단상에 선 목사는 목청껏 절규하지 않는가?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준 분명한 사실은, 시끄럽고 어지럽고 혼란스러울 때에는 성령께서 일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가 갈라져 싸우고 있는 한복판에서 성령이 팔짱 끼고 심판을 보시는 일은 없다. 인간들의 고함이 난무하고, 서로 잘났다고 우격다짐을 하고, 급기야 폭력까지 동원되는 그런 곳에는 성령이 계실 이유가 없다.

구약의 사울의 사례에서 보듯이, 선한 영과 악한 영은 같이 있을 수 없다. 성령은 우리 가운데 평화와 기쁨이 있어야 오시고, 같이 계시고, 같이 움직이신다. 호수가 잔잔할 때 주위의 풍경을 온전히 담아내듯이, 우리 마음 가운데 혹은 공동체 가운데 평화와 기쁨이 있을 때 성령이 원하시는 대로 그림을 그리실 수 있다.

그러니 마음에 평화와 기쁨이 없는, 영적인 절망이나 낙담의 상태에서는 어떤 결정도 하지 않는 게 정답이다. 사울은 선한 영이 떠나가고 악한 영이 찾아왔을 때에도 계속 움직였고, 일을 벌였고, 판단했다는 점을 명심하라! 영적인 낙담이나 절망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다. 이미 내린 결정도 번복해서는 안 된다 지금 당신은 열 받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라.

분별력의 대가인 토마스 그린 신부도, “이것만 기억한다면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불행의 90%는 줄일 수 있다”라고 말한다. 서두르는 게 오판의 가장 큰 원흉이라는 것은 다 아는 상식 아닌가? 얼마나 더 많은 실수를 해야 이 간단한 지혜 하나를 몸에 익히겠는가? 결정을 아예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단, 미루라는 말이다. 그리고 기다리라는 말이다. 이 일에 연관된 자들과 일치될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다.

물론 넋 놓고 기다리라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묵상으로 우리의 동기를 점검하면서 외부의 환경적인 소음에서 자유로워지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정말 왜 이런 결정을 하려는 것인가? 침묵과 인내와 기다림을 통해 정말 좋은 결과, 오래 맺히는 열매를 원하는가? 그러면 마음에 평화와 기쁨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라! 지금 마음을 둘러싸고 있는 무관심과 낙담과 실망이 몸 속에서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려라. 

단, “성령의 불을 끄지 마라!”(살전 5:19) 하나님이 결국 우리를 주님의 평화 가운데 인도하실 거라는 믿음만 붙잡아라. 언젠가는 이 긴 터널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그 기회가 사라졌다면, 결정의 순간이 무효가 되었다면, 이미 다른 누군가의 몫으로 넘어가 버렸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예비하지 않으신 것이라고 확신하라!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서 예비하신 것이라면, 그것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아무리 당신에게 불리한 상황이어도 아무도 낚아채 가지 못할 것이다. 또는 그 일은 지나갔지만 더 좋은 일로 채워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그렇다고 우리 자신을 극한까지 몰고 가서는 안 된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명한 계시를 받기 위해 금식도 정도껏 해야 한다. 몸까지 상할 정도로 해야 하는 거라면, 이것을 원하시는 하나님은 지독한 분, 못된 경영주이실 것이다. 아니면 우리를 상해하고 기쁨을 얻는 못된 새디스트이실 것이다.

이전에 누누이 말한 완벽주의의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나님이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고, 그것에 대한 분명한 소리를 들을 때까지 양보하지 않겠다는 인간적인 오기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이것도 교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얍복 강가의 야곱이 그립다고, 죽자사자 하나님과 씨름해서 스스로 생채기를 낼 필요는 없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스스로 생각하기에 더 이상 이런 불확실성 속에서 자신의 믿음과 물리적인 에너지가 지탱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그리고 외부 요인이 결정하도록 만들고 있다면, 그 상태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결정을 하는 게 맞다. 하나님이 우리의 요구에 반드시 우리의 방식으로, 우리의 시간에 맞춰 응답하실 이유는 없다. 이때 우리의 기도는 이럴 수 있다.

“하나님, 지금까지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와 간구를 해왔지만 제 마음 가운데 선명함을 얻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제 결정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 마음이 많이 지쳤습니다. 저는 이런 이유로 이렇게 결정하고자 합니다. 제가 볼 때는 이 방법이 가장 최선일 것 같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앞으로의 모든 과정을 주님 손에 맡겨드립니다. 제가 결정한 이 일이 주님 보시기에 합당치 않으면 중단시켜 주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주시는 순종의 마음을 가지고 그만두겠습니다. 그렇지 않고 당신이 보시기에 좋은 일이라면, 성령을 보내 주시어 어떤 유혹과 방해가 있을지라도 진행시켜 주시고 제게는 흔들리지 않는 힘과 용기를 허락하십시오. 무엇보다, 이런 과정에서 제가 만들어 놓은 결과나 목적, 세상의 기대에 집착하지 않게 하시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십시오. 그래서 이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영광만 온전히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이제 마음이 편해졌는가? 그 어떤 가책이나 집착이나 기대에서도 자유로워졌는가? 그러면 다시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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