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 속에 있는 존재"

라반과 평화조약을 맺고 잔치를 열고 하룻밤을 보낸 야곱은 고향을 향해 출발한다. 라반은 아침 일찍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에게 축복을 베풀었다. 야곱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위기를 잘 극복하고 라반의 축복 속에서 당당하게 고향을 향해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야곱을 죽이려 달려왔던 라반이 노기를 풀고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야곱은 또 다른 위기에 봉착한다. 이 위기는 야곱이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위기였다.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에서와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20년 전 야곱이 도망자 신세가 되어 성급히 고향을 떠난 후 에서에 대한 소식을 들은 적이 없었다. 어머니 리브가는 에서의 화가 가라앉으면 사람을 보내 야곱을 부르겠다고 말했지만, 단 한 번도 고향 소식을 듣지 못했다. 흘러간 세월 동안 에서의 분노가 가라앉았는지 아니면 분노가 증폭되었는지 야곱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야곱의 이러한 불안한 심정은 에서에게 전하라는 전갈 내용에 잘 드러나 있다.

"너희는 이같이 내 주 에서에게 고하라. 주의 종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에게 붙여서 지금까지 있었사오며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사오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고하고 내 주께 은혜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더라 하라"(v. 4-5)

야곱의 전갈은 그가 20년 전 에서에게 했던 몹쓸 짓을 잊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는 에서를 지극히 높여 "내 주"로 부르고 자신을 지극히 낮추며 "주의 종"이라 부르고 있다. 이보다 더한 아부는 없을 것이다. 야곱이 에서를 "내 주"라 부르고 자신을 "주의 종"이라 칭한 것은 에서에 대한 두려움과 양심의 가책이 컸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야곱은 20년 전 아버지로부터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될 것이라는(27:29) 축복을 받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에서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다는 야곱의 전언도 자신이 받은 장자의 유업으로 재산권을 행사할 의도가 없음을 보임으로써 에서를 회유하고 안심시키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자로 보낸 종들이 갖고 온 소식은 무시무시한 내용이었다.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v. 6). 그 소식을 들은 야곱은 당당해야 했다. “나의 산성이시요 나의 구원의 피난처”이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데 사백 명의 무리들이 어떻게 해할 수 있겠느냐고 담대하게 그들을 맞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당당하지 못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야곱에게는 무장한 부하가 한 명도 없었다. 연약한 부인들과 아이들, 종들 그리고 가축들뿐이었다. 이러한 식솔들을 향해 창과 칼과 화살로 무장한 병사들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일반적으로는 등장인물의 내적 감정을 분명하게 묘사하는 법이 없는데 여기서는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라는 표현으로 야곱의 심적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야곱의 신앙 수준을 보게 된다. 야곱은 그때까지 세 번에 걸쳐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경험했다(창 28:10-22, 31:3, 32:1-2). 고향을 향해 출발할 때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났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군대임을 알았고 그 땅 이름을 마나하임이라 불렀다. 그런데도 위기에 봉착하자 그런 체험들이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야곱은 집념의 사나이답게 공포에만 사로잡혀 있지 않다. 식솔들을 두 패로 나누었다. 에서가 한 패를 공격하면 나머지 한 패라도 피신시키고자 함이었다. 나름대로 궁여지책을 마련했던 것이다. 사실 그에게는 도망갈 곳이 없었다. 오던 길을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바로 어제 라반과 다시는 돌무더기를 넘어 돌아오지 않겠다는 협정을 맺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의 자리였다. 인간은 절망의 자리에 다다라서야 하나님을 찾는다. 야곱도 하나님만이 그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그 절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찾으며 간절히 기도한다.

그의 기도는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10)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집안과 맺은 계약을 환기시킨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어려움에 처한 아브라함과 이삭의 후손인 자신을 돌봐 주셔야 한다는 우회적인 청원이다.

이어지는 기도 역시 하나님의 돌보심을 상기시키는 내용이다. "주께서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9).

야곱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신의 무가치함을 고백한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10). 그런 자신을 하나님께서 지난 20년 동안 어떻게 돌보아 주셨는지를 언급한다.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그렇게 해주신 하나님께서 지금 위기에 놓인 자신을 돌보아 주시는 것이 마땅하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런 후에 본격적으로 자신의 청원을 하나님께 아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를 칠까 겁냄이니이다"(11).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인용하는 것으로 끝난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약속하셨나이다"(12). 이 말은 야곱과 그의 자식들이 에서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하나님께 하신 수많은 후손에 대한 약속이 물거품이 되지 않겠느냐는 반문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상기시키고 그 말씀에 대해 책임지시기를 촉구하는 기도이다.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를 한 후에도 하나님만 신뢰하지 않고 인간적인 모든 방법을 모색한다.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기보다 끊임없이 인간적인 방법을 모색하는 이중적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야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야곱은 자신의 힘으로 살 궁리를 한다. 가축들을 골라 무려 580마리에 달하는 뇌물을 준비한다.

그 선물을 한 번에 주는 것보다 여러 번 전달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하고 다섯 번에 걸쳐 전달하기로 했다. 야곱은 20년 전부터 에서의 심리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야곱은 다섯 그룹으로 나눈 종들이 에서에게 선물을 전달할 때마다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18)라고 인사하라고 지시했다. 사실 야곱이 에서에게 바친 선물은 복종과 존경의 표시로 드리는 일종의 공물이었다. 히브리 단어 "민하"는 일차적으로 종속된 국가가 종주국에 세금처럼 바치는 공물을 의미한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메시지를 확인하게 된다. 비록 드러내 고백하고 있지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과거 자신이 범했던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는 것과, 자신을 에서에게 종속시킴으로써 지난 20년 전 아버지의 축복을 통해 받은 특권을 에서에게 돌려주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리고 난 후에도 눈앞의 위험으로 닥쳐온 에서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인간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야곱의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분명한 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해야 했다는 사실이다.

이어지는 상황을 보면 야곱의 인간적 계획과 수고, 두려움은 필요 없는 것들이었다. 야곱의 머리카락 수까지도 낱낱이 세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고향에 돌아왔을 때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계셨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이미 녹여놓으셨기에 에서는 야곱을 해칠 의도가 추호도 없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확신이다. 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상황을 다 아시고 돌보고 계신다.' 는 전적인 신뢰이다. 삶이 뿌리째 흔들릴 때 이러한 확신은 더욱 중요하다. 하지만 야곱에게 이러한 확신이 없었다. 어떤 학자들은 야곱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있다고 단정하면서 그를 비난한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있기에 인간적인 안전장치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야곱을 불신앙의 사람으로 보기보다는 연약한 신앙인으로 보는 것이 맞니다. 신앙의 뿌리가 깊지 않기에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야곱의 모습이 사실 우리들의 모습이다. 신앙과 인간적 계산이 따로인 모습이 바로 온전히 성화되지 못한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거센 풍랑 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깊은 잠을 주무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이 울부짖었을 때 예수님은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 8:26)라고 야단치셨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기도한 자리의 무릎 자국이 지워지기도 전에 살 길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그 모습을 불신앙이라 비난해선 안 된다. 인간은 그렇게 연약한 존재이면서 목표를 향해 변화해 나가는 과정적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과정적인 존재이다. 과정적인 존재란 계속해서 변화해 나가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출발점에 서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 속에 있는 존재라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성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빌립보서 2:12에서 사도 바울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의 구원을 이루라"고 말한다. 여기서 구원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의미의 구원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성품을 완성한다는 의미에서의 구원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단번에 이루어지지만 거듭난 자로서 그리스도인의 성화를 향해 가는 성숙은 점진적이라는 말이다.

기독교는 깨달음의 종교가 아니다. 어느 날 깨달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완성되는 그런 종교가 아니다. 깨닫고 한 걸음 나아가고 또 깨닫고 부딪혀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기도 하고 그것을 넘어 진일보하기도 하는 그런 존재, 그것이 과정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무한정 실패만을 반복하는 사람들로 살아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사도 바울의 말처럼 그리스도인은 늘 깨어서 경성하고 겸손하게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기 위해 매순간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과정적인 존재로 여겨 주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실 때도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과정적 존재로 대하시듯이, 우리 또한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을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함으로써 우리 모두 영적 성장의 길을 잘 달려갈 수 있도록 격려하는 따뜻한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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