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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뉘
윤효순  |  캘리포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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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5.06  23:5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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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뉘의 뜻
* 작은 틈을 통하여 잠시 비치는 햇볕
** 그늘진 곳에 비치는 조그마한 햇볕의 기운
***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보살핌이나 보호

두려움이 겹겹이 나를 둘러치고 있었다. 먹회색 구름이었다. 넓이도, 길이도, 두께도, 무게조차도 가늠할 수 없는 깊은 두려움의... 그때 볕뉘라는 순수한 우리말이 떠올랐다. 처음 이 단어를 만났을 때 얼굴에 함박 미소가 피어났다. 세상에! 어쩌면 이리 고울까! 참 예쁜 말도 있구나!

희망이었다. 빛은 언제라도 어두운 곳을 비추려 작은 틈을 찾고 있을 것이다. 정말 그랬다. 내가 만났던 어둠 속에서도 그러한 순간은 어둠의 수 만큼이나 많았음을 살아온 날들을 되짚어보면 곧 알 수 있다. 볕뉘는 꿈을 꾸게 했다. 소망을 갖게 했다. 힘을 내게 했다. 그리고 파란 하늘, 서늘한 바람까지 선물해 주었다.

2020년 봄을 빼앗기고 말았다. 시간은 정지된 듯했다. 지나고 보면 하루가, 한 주가, 한 달이 겹쳐서 도망가 버렸다. 먹회색 구름 속의 봄, 그 안에서 볕뉘가 되었던 작은 희망들을 적어 본다.

이야기 하나: 꽃을 사는 마음

누군가를 위하여 꽃을 산 적이 언제였던가? 아스라했다. 내가 꽃을 샀다면 문병의 경우가 유일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문병조차 환자의 기호를 생각해 가며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만들기 일쑤였다. 이젠 꽃을 받아도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다. 시든 후 버려지는 것이 아까운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난 꽃을 사기로 했다. 그날 그가 한 일은 진실한 마음의 향기였기에 어떤 답례보다도 꽃이 적절할거라는 결정을 하게 되었다. 그가 세탁물을 찾아가기로 약속한 오늘, 가장 빛나고, 향기롭고, 선명한 꽃을 찾아낼 거라는 마음에 경쾌한 발걸음은 가게 앞 식품점 꽃매장을 향했다.

보이지 않는 무서운 적, 코로나가 예측할 수 없는 속도로 미국을 강타하기 시작했던 삼월, 그 중순에 나는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사회적 압박, 그리고 아이들의 염려에 못 이기는 척, 34년 동안 개근상을 받아야 했던 가게를 무려 두 주일이나 닫았다.

4월 초 영업 시간을 반으로 줄이고 가게를 열었지만, 자가 격리하는 것처럼 손님은 없었다. 우리 가게가 있는 빌딩은 서로 다른 업종의 열두 가게가 영업을 하고 있었지만 모두 문들 닫고 있었다. 주차장에도 사람은 고사하고 자동차조차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었다. 벽에 걸린 시계만이 똑딱거리며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적막은 큰 두려움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딩~~~동’ 하며 사람이 들어왔다는 신호가 울렸다. 의자에 움츠리고 있던 몸이 스프링처럼 펼쳐졌다. 마스크를 챙겨쓰고 카운터로 나갔다. 정녕 반가운 손님이 왔다. 그도 방독면 같은 마스크를 쓰고 세탁물을 들고 서있었다. 악수도 할 수 없는 상황, 난 그저 발을 동동거리며 박수를 쳤다.

세탁물을 내려놓고는 지금의 세태를 이야기하며 조심할 것을 당부하는 모습이 꼭 아들이 어머니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우린 서로 가족과 사업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면서 잘 견디어보자는 격려의 말을 했다. 같은 어려움을 짊어진 동지 의식이 느껴졌다. 커다란 눈에 안쓰러워하는 표정까지 담고 뒤를 돌아보며 세탁물을 손에 들고 그는 나갔다.

그가 문을 나서는데 누군가가 말을 거는 기척이 느껴졌다. 지나가는 사람이려니 하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런데 그 손님이 차 안에 세탁물을 넣고 다시 왔다. 볼 일이 더 있나? 의아해 하면서 나도 문쪽으로 갔는데 그는 옆가게 쪽으로 갔다. 옆가게의 창턱에 노숙자가 앉아 있다가 구걸을 했던가보다. 나는 문 옆으로 다가가서 긴장한 채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손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돈은 당신의 일주일 식사 비용으로 충분할 겁니다. 자, 보시오. 이 건물의 가게 중 몇 군데나 문을 열었나요. 이 가게를 제외하곤 없습니다. 문을 열고 있는 이곳도 지금 많이 힘들어하고 있어요. 그런데 당신이 여기 있으면 더 힘들어 할 것입니다. 당신도 많이 힘들겠지만 모두가 힘든 시기입니다. 이 돈을 들고 지금 당장 다른 곳으로 가세요. 그리고 다시 오지 마세요!‘

말을 마친 그는 자신의 차 안으로 들어갔다. 난 감동으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서있었다. 굶주리고 있었을 노숙자에게도 반가운 도움이 되었으리라. 한참을 꼼짝 않고 서있는 내 눈에 멀리서 노숙자가 엉금거리는 걸음으로 길을 건너가는 모습이 보였다. 내 안에선 향기로 퍼져오는 사람의 마음을 즐기고 있었다. 한참이 지난 바로 그 시간, 차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 안에서 노숙자가 멀리 가기까지 기다렸다 가는 손님의 깊은 마음이 만들어낸 소리였다.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시간에 손님으로 온 그는 와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반갑고 행복했다. 그의 말대로 모두가 어려운 지금, 혼자 가게를 지키고 있었던 노친네를 위한 배려, 생색내지 않고 오히려 내가 알아버릴까봐 조용한 목소리로 나의 두려움을 덜어주려 했던 고마운 마음. 사람만이 많들어 낼 수 있는 향기. 맡아지지 않지만 느끼기에 충분한 향기, 바로 그것!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신비한 힘을 그가 퍼뜨렸다.

난, ‘당신의 마음에서 퍼져나온 향기를 알아버렸다’고 답을 하고 싶은 마음에 선뜻 꽃을 사기로 결정했다.

어렵다. 많이. 그러나 힘을 잃지 말라고, 그날 또 한 번의 빛이 번쩍 보였다. 울창하게 덮인 구름 사이 작은 틈으로 한 줄기 가늘고 강하게 들어온 밝디 밝은 햇빛, 그 손님의 마음을 통해서 나에게 온 볕뉘.

벼랑 끝이라고, 만신창이가 되어 더는 견딜 힘이 없다고 몸부림칠 때, 우리 주님은 ‘내가 여기 있노라’ 하시며, 어떤 틈새라도 사랑의 손길 보여 주시리라.

그날 나를 향해 비춰진 볕뉘는 그 손님의 마음을 통해서 왔다. 내 작은 마음도 암울한 세상을 둘러친 구름 속의 틈새가 되어 하나님 사랑의 빛을 비추었으면 좋겠다. 내 손이, 내 발길이 하나님의 실눈이 퍼지는 통로가 되어, 한 줄기 볕뉘로 누군가의 어둠 속에 스며들기를 소망해 본다.

여러 가지 꽃을 섞은 꽃다발을 안고 걷는 난 두려움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는 적들에게 승리의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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