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예배 시리즈 (19)

 

복음의 시작

마가복음 1:1은 창세기 1:1이 천지창조를 알리는 것과 맥을 같이해 복음의 시작을 알린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 ‘복음’은 헬라어로 ‘유앙겔리온’이다. 승전보를 비롯해 황제와 관련된 모든 사건들은 좋은 소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마가는 의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한다. 마가복음 15:39에서도 로마 백부장의 고백을 인용해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선포한다. 아울러 로마 황제에게만 해당되었던 용어를 사용해 예수의 ‘유앙겔리온’(복음)이라고 선포한다.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에도 변하지 않는 좋은 소식이 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죄가 들어와 모든 사람이 죽게 되었으나(롬 5:12), 한 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의의 선물로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소식이다(롬 5:15하-17). 지금 전 세계가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전염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 휩싸여 있지만, 이 또한 죄에서 비롯된 결과이며, 이에 대한 복음 즉 좋은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는 것이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온 인류가 죄에 물들어 하나님께 스스로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로마서 1:17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말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에 이를 수 있음을 알려 준다. 구원의 소망이 없었던 우리에게 복음은 코로나19 대유행의 와중에 치료제나 백신보다  큰 소망을 안겨 주는 좋은 소식이다. 

주님은 누구인가?

복음이 실제로 효력이 없다고 느껴지는가? 그러나 복음은 엄연한 사실이고 이미 시작되었다. 마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 죽음 및 부활이라는 사실을 복된 소식이라고 선포했다. 이 복음을 내용만 알고 이해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섬기는 삶을 살 때 복음의 효력이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아는 것과 주님으로 섬기는 것은 차이가 있다. 

“주”(Lord)는 히브리어로 “아도나이”이며, 절대적인 주재자를 의미한다. 헬라어로는 “큐리오스”이고, “주인”을 뜻한다. 그리스 문화권은 다신주의여서 복수형 큐리오이를 썼지만, 예수 그리스도만 주님이시기에 단수형 큐리오스가 쓰였다. 예수님 당대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주’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라고 여겨, 예수님께는 ‘당신’이나 ‘랍비’라는 호칭만 사용했다.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마 22:41-46). 이 논쟁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성경은 다윗이 하나님과 동시에 그의 주라고 고백할 주님이 있음을 알려 준다. 

마태복음 22장에서 예수님이 인용한 시편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는 “여호와께서 내 주 곧 아도나이(예수 그리스도)에게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아도나이(예수 그리스도)의 원수들로 아도나이(예수 그리스도)의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아도나이(예수 그리스도)는 여호와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가 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사탄을 완전히 굴복시키셨음을 예표한다. 하나님 오른쪽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도신경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거기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에 나와 있듯이,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 묘사되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다윗의 주님이요 믿는 자의 주님이라 말씀하신 것이다. 

믿음에서 섬김으로

마르다와 마리아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었다. 요한복음 11:20-27에서“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말씀드리기를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였다. 마르다가 주께 말씀드리기를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시니 그녀가 주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하였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실제로 보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주님이심을 믿고 고백했지만,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는 그녀의 말과“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는 그녀의 대답을 보면, 그녀의 믿음은 현재에는 효력이 없는 먼 미래에 대한 기대처럼 보인다. 동시에 요한복음 1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는  구절을 보면, 그녀의 믿음에는 주님을 향한 절대적인 순종과 섬김이 결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요 11:32)라는 말씀만 보면, 마리아도 누이 마르다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 12:1-8)라는 말씀에서는 주님을 향한 마리아의 믿음이 섬김으로 나타난다. 

어쩌면 우리도 마르다처럼 주님을 향한 믿음을 정확하게 고백하고 주님을 믿고 있다면서도, 현재가 아닌 미래의 이야기로 여기고, 주님을 향한 마리아의 섬김은 빠진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섬김의 또 다른 표현은 예배이다. 이 시대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복음을 듣고, 복음을 믿고, 복음의 주인되신 주님께 내 모든 것을 깨뜨려 예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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