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고 팬데믹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자 지구의 종말에 대해 관심이 다시 커지고 있습니다. 익숙한 이름인 노스트라다무스가 소환되고 있고, 계시록을 공부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조금 안다는 사람들은 마지막 대접 재앙의 첫번째 징조로 보기도 하고, 출애굽기의 다섯 번째 재앙이나 여섯 번째 재앙 이야기를 코로나 사태와 연결짓기도 합니다. 

2021년 초가 되면 지구 종말 시계(The Doomsday Clock)가 핵전쟁이 아닌 전염병 때문에 자정을 향해 1분 더 옮겨질지도 모릅니다. 시작한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법이므로 지구의 역사도 언젠가 끝에 이를 것입니다. 지금의 현상이 이전보다 더 종말에 가까운 징조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언제가 끝인가에 대한 관심보다, 이 과정 중에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관심을 갖는 것이 현실적이고 실존적이며 성경적인 태도일 것입니다. 

이집트 파라오의 자리에 있었던, 출애굽 시대의 ‘바로’라는 인물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당대 최고의 문명국가 중 하나였던 이집트에서 절대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그는 무서운 것도, 부러운 것도 없는 지존이었습니다. 그는 곧 법이었고, 모든 사람을 말 한 마디로 조정할 수 있는 콘트롤러였습니다. 그의 관심은 자신의 나라를 어떻게 하면 부강한 나라로 만들고 자신의 권력을 어떻게 오래 유지하고 확장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그런 계획들은 제법 성취되는 것 같았습니다. 한 노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국외로 도망쳤다가 40년만에 나타나, 소수민족이자 이민자의 대표로 찾아온 모세의 당돌한 요구를 파라오는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그것으로 모세와의 만남은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까지 늘 그랬으니까요. 주변 사람들은 그의 눈빛만 보고도 할 말을 접었고, 같은 이야기를 두 번 꺼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달랐습니다. 재차 면담을 요구했고 이미 거절한 요구 사항을 또 요구하며 그를 성가시게 했습니다. 파라오는 술사들을 동원해 위세를 과시하기도 했고, 빈말로 들어주겠다 해놓고 언제 그랬느냐는 식의 물먹이기도 해보았습니다. ‘내게 결정을 바꾸라고 요구하다니,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줄 알아야지 어디서 감히...’ 

하지만 모세는 포기하지 않았고 세 번, 네 번 그를 찾아왔습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처음 나타났을 때의 조심스럽고 긴장한 모습은 사라지고, 점점 더 힘이 들어간 목소리와 두려움을 모르는 자세로 성큼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재앙이 임하자, 주변 사람들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술사들은 더 이상 모세를 흉내내지 못했고, 백성 일부는 두려워하는 모습들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파라오는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말과 표정을 더욱 근엄하게 지었습니다. 이집트의 왕이 고개 숙이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합니다. “왕이 우리를 내보내지 않을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다만 나는 전달할 뿐입니다. 당신이 살 길은 당신이 신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당신만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할 진리입니다. 당신이 소유물로 여겼던 사람들(히브리민족들)이 더 이상 당신의 것이 아님을 인정하고 풀어 주어야 합니다. 이를 부정하면 할수록 당신에게는 더 큰 심판이 닥칠 것이고 당신의 종말은 앞당겨질 것입니다.” 

저는 이집트의 파라오에게서 현대의 과학과 물질과 권력 그리고 이에 올인하여 파라오에 집착하는 인간을 봅니다. 현대의 파라오들에게 초라한 노인 모세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올런지요. 그러나 코로나와 같은 대재난을 겪으며 종말을 생각해 본 파라오라면, 깨달아야 하고 인정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모세는 답을 이미 가르쳐 주었습니다. 과학은 겸손해야 합니다. 과학은 신이 아닙니다. 물질은 인간을 풀어 주어야 합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권력은 예배 대상이 아니라 예배자의 도구로 기능이 축소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권력의 존재 이유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것들을 추구하며 파라오의 자리에 올인했던 인간은 이제부터 예배자의 자리에 올인해야 합니다. 인간은 예배 받을 때가 아니라 예배할 때 가장 아름답고 은혜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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