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알링턴 국립묘지

최근 알링턴 국립묘지의 원형극장에서 구리 상자를 꺼냈다. 그 상자는 1915년에 봉인되었다. 상자 안에는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의 서명이 들어 있는 사진, 워싱턴의 4대 일간지, 자그마한 성조기, 워싱턴 시 주소록과 갈색 종이로 싼 다음 빨간색 실로 묶은 성경 등이 들어 있었다.

타임 캡슐, 공식 명칭 “수집품 상자”는 1915년 원형극장의 모퉁잇돌 속에 들어 있었다. 국립묘지는 원형극장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이 상자를 공개했다.

역사가 스티브 카니는 “1915년에는 세상이 어떠했는지를 볼 수 있는 기회”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3년 안에 미국은 완전히 달라졌다. 제1차 세계대전의 공포를 보았고, 스페인 독감 사태를 겪었다. 만일 그 상자가 1920년에 봉인되었다면 상자 안에는 전혀 다른 내용이 담겨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놀랍게도 타입캡슐 옆에서 낯선 상자가 발견되었다. 1990년대에 타임 캡슐이 현재의 장소로 옮겨졌을 때, 또 다른 타임 캡슐이 그 옆에 놓였다. 노동자들이 자신만의 자그마한 타임 캡슐을 그곳에 넣어둘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그들은 명함과 기록을 넣어 두었고, 나중에 그 캡슐을 찾았다. “그들이 찾은 것은 피터팬 브랜드의 텅 빈 땅콩버터 통이었다.”라고 관리위원 캐이틀린 스미스는 말했다. “그것은 급조된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에 이름을 넣고 싶은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존스 홉킨스 대학이 수집한 자료들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확진자는 5백만 명이 넘었다. 전 세계 사망자 수도 32만9천 명이 넘었다. 누군가 지난해 가을에 타입 캡슐을 만들었다면, 오늘 또 다른 누군가가 만드는 타입 캡슐과 어떻게 다를까?

프랑스의 한 디자이너는 램프의 갓처럼 천정의 케이블에 매단 플라스틱 팟을 만들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면서 식사할 수 있도록 디자인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열한 명의 대통령을 모셨던 백악관의 집사가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돼 사망했다. 윌슨 루즈벨트 저먼은 1957년부터 일을 시작했고, 케네디 대통령 재임 중에 집사로 승진했다.

세계보건기구는 5월 20일, 새로운 코비드-19 감염이 10만 건을 넘어섰다고 보고했다. 유행병이 시작된 이래 감염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날이다.

사진 출처 - 알링턴 국립묘지

그리스어로는 카르디아인 heart는 신약에 157번 나온다. 여기서 heart는 신체 조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주석서는 “이해와 지식과 의지의 자리”라고 부른다. 신앙을 위한 혹은 반대하기 위한 결정은 heart(마음)에서 발생한다(막 3:5; 6:52; 8:17; 11:23; 마 13:15; 눅 24:2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막 3:5). “이는 그들이 그 떡을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라”(막 6:52).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을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막 8: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중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 11:23).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 13:15). ”마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 24:25).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고자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heart로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의 주님과 이웃에 대한 그런 헌신이 회의적이고 세속화된 문화에 변화를 일으킬까? 우리는 이미 그것을 경험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서기 161~180년에 로마의 황제였고, 당대의 유명한 사상가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그는 기독 신앙보다는 스토아 철학의 가치관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명상록>에서 그는 “모든 것은 의견”이라고 썼다. 그는 “삶은 전쟁이고 이방인의 거류이며 명예 이후는 망각이다.”라고 확신했다. 그 결과 그는 죽음을 “모든 생물을 구성한 요소들의 분해”로 보았다. 그는 ”계속 다른 것으로 변화하는 요소들 자체에 해가 없다면, 어째서 모든 요소들의 변화와 분해에 관해 알아야 하는가?”라고 반문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는 믿어야 할 객관적 진리도 사후 세계도 없었다. 그는 다가올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몰랐던 것은 크리스천 신앙과 그의 그런 기만에 대한 해답들이 그가 이끌던 제국을 곧 지배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후 수 세기에 걸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요 14:6) 그분에게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인도되었다.

라비 자카리아스는 이 세대에게 복음을 전하는 법을 설명한다. 불행히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믿은 것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 그들을 향한 우리의 최고 간증은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지 않고는 경험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들을 거룩하고 설득력 있게 사랑하려면, 우리는 주님을 힘과 영과 혼과 마음을 다해서 사랑해야 한다.

오늘 당신은 이러한 헌신을 삶의 최우선순위로 삼겠는가? 라비 자카리아스는 이런 글을 남겼다. ”우리는 눈으로 듣고 느낌으로 생각하는 세대 속에서 살고 있다. 그들이 당신과 내 안에서 복음을 볼 수 없다면, 그들은 당신과 내가 그들에게 보여 주고자 하는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 안에서 복음을 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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