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성경 그리고 분별 (18)

 

감정과 분별 6 

하나님은 선하시고 신실하신 분이다. 시편 23편의 말씀과 같이,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우리와 함께하시고, 심지어 우리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를 위해 상을 차려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런 분을 하나님 아버지로 고백하며 산다. 그런데 왜 우리 마음에는 평화와 기쁨이 없고, 낙담과 불신과 불안과 절망이 찾아오는가? 

아내가 암 진단을 받고, 수많은 검사로 인한 실망과 후속 치료로 인한 고통의 과정을 겪으면서, 아내와 나는 평화와 기쁨보다 낙담과 절망을 더 많이 체험했다. 환자는 환자대로 걱정의 연속으로 힘겨웠지만 보호자인 내게도 우울증이 찾아왔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기적이라는 말이 적절할 것 같았다. 수없이 우리의 과거의 삶을 되돌아 봤다. 뭘 잘못했지? 평소에  말이 없는 아내여서 굳이 내게 표현은 안했겠지만 남편 몰래 많이 울었을 것이다. 암이 참 지독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그래도 자비하신지, 아내의 목소리와 얼굴에만은 평화를 주셨다. 암세포가 온몸의 세포의 힘을 쏙 빼버렸지만, 그래서 살이 축축 처지고 말았지만, 목소리는 맑고 얼굴은 빛났다. 어느 교인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 얼굴은 광채가 난다”고. “목소리가 좋아 건강한 사람 같다”고. 이런 청아한 목소리와 안면의 광채의 뒷면에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낙담과 불안이 있었을 것이다. 매일 밤 드리는 예배를 통해 수없이 하나님께 물어봤을 것이다. “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 하나님은 아실 것이다. 우리가 왜 이런 영적인 바닥 상태에 있어야 하는지. 우리가 왜 고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지. 이그나티우스 성인은 이 문제에 대해 실질적으로 고민했고, 그의 영신수련을 통해 구체적인 원인들을 제시했다. 그의 지혜를 빌자면,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은 하나님에게서 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무슨 말인가?

그는 영적인 낙담이나 절망 상태의 원인에 대해서 그의 영신수련 322항을 통해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영혼이 고독해지는 데는 세 가지 주요 원인이 있다. 첫째, 경건의 연습을 싫어하거나 태만하거나 게으르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잘못으로 영적 위안, 마음의 평화와 기쁨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죄를 말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하나님의 평화와 기쁨 없이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도 하나님을 향한 헌신과 사랑이 변함 없는지를 확인하길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질투가 꼭 이런 방식으로 나타나야 하는지?) 셋째,  평화와 기쁨과 같은 영적 위로는 우리의 자구적인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영적인 고독 상태를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겸손을 위해서인가?)”

문제가 생기면 흔히 원인을 다른 데서 찾는다. 쉽게 남 탓을 할 수도 있다. 나도 이런 부류의 인간에 속한다. 무슨 일이 닥칠 때마다, 영적 낙담이나 절망 가운데 빠지면 자신을 먼저 살펴보기보다 주위 사람들의 잘못을 들춰낸다. 위에서 첫 번째 원인은 나 같은 자에게 주는 경고이다. 나 스스로의 양심과 의식의 성찰을 통해, 원인이 나의 경건성에 대한 게으름과 불찰에서 비롯됐다면, 다시 신앙의 불을 지피도록 노력해야 한다. 마음에 평화와 기쁨이 없어지면 질수록 더욱더 열심히 경건한 삶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대단히 의식적인 노력들이다.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기도하던 자가 시계를 보기 시작하면 그때가 위기라는 것. 불안해지기 시작하면 더욱더 많은 시험과 유혹들이 찾아온다. 나쁜 영들이 찾아오기 좋은 환경이 되는 것이다. 이럴 때 이그나티우스를 비롯한 선조들의 지혜는 한결같다. 악한 영들의 선동과 반대되는 방법으로 할 것(‘아게레 콘트라’). 이것이 악에 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물론 악의 영에 직접적으로 저항하는 방법도 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악은 약자만 찾아다니지 않던가? 그러니 주님의 이름으로 대항하고 내쫓으라는 말이다. 구마사(驅魔師)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싸운다. 하지만 평범한 신자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일이 아니다. 이런 일은 특별한 은사자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우리가 할 일은 원점으로 돌아가 지혜롭게 악을 피하는 것이다. 토마스 그린 신부의 비유가 이때 새롭다. 

“기도자는 뱀의 꼬리를 보면 그 나머지 부분까지 찾으려 하지 말고, 뱀의 종류에 대한 판별은 전문가에게 맡긴 채로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이다.”

스페인의 영성의 대가인 마이클 몰리노스의 조언 역시, 그가 죽은 지 300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유효하다. 

“여러분의 원수는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에게 행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무시당할 때 가장 기력을 잃습니다. 자기가 행하고 제안한 모든 것들이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려움의 기간들을 위대한 행복으로 여기시길 바랍니다. 더 많은 공격을 받을수록, 여러분은 평강 속에서 더 많이 기뻐해야 마땅합니다. 슬퍼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행하시는 복으로 인해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의 적이 누구인지 전혀 보지 못한 자처럼 살아가십시오. 염려를 버리고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십시오”

“여러분의 원수는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에게 행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무시당할 때 가장 기력을 잃습니다. 자기가 행하고 제안한 모든 것들이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려움의 기간들을 위대한 행복으로 여기시길 바랍니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평상시보다 더욱더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고, 더욱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욱더 열심히 찬양하고, 더욱더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고, 더욱더 열심히 구제와 봉사를 하고, 더욱더 열심히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기에 힘쓰는 것이다. 즉 더욱더 ‘사랑이 증가하는 활동’에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더욱더 가까이 갈수록, 사람들과 더욱더 분열하지 않고 연대할수록, 일상에서 아름다운 일들에 더 많이 노출될수록, 우리는 악한 영의 시험에 말리지 않고 승리할 수 있다. 

낙담과 절망 중에 있을 때, 우리는 앞서간 많은 성인들의 삶이 보여준 것처럼, 이 시기는 곧 지나가고 새 날이 올 것을 굳게 믿으며, 어제와 동일하게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이 즐겨 받으실 일을 꿋꿋이 해나가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빌립교 교인들에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빌 4:6)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며, 더욱더 공동체적으로 중보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알려 주는, 영적인 메마름과 시험에서 이기고, 원수를 무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주시지 않겠는가?”(빌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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