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일일 칼럼을 쓸 자격이 과연 내게 있는가 하는 의문이 오늘 아침에 불쑥 들었다. 나는 61년 동안 인종차별을 단 한 번도 당해본 적 없는 백인이다. 그래서 피부색 때문에 불공평한 대우를 받는 게 무언지 잘 모른다. 중산층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경찰이나 법원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지금의 폭력 사태로 피해 입은 비즈니스를 소유하거나 일해본 적 없어서,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미니애폴리스의 비극적인 죽음에서 비롯된 폭력에 자신의 꿈과 미래가 파괴된 현실을 바라보는 심정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칼럼은 내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려고 쓰는 것이 아니다. 나의 소명은 오늘의 소식을 문화 및 성경의 맥락에서 해석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현충일에 일어난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은 끔찍한 비극이었다. 하나님 아버지는 인종차별을 싫어하시며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는 만큼 서로를 사랑하라고 명하신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세기 1: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어제 5월의 마지막날 밤, 미국은 플로이드의 사망에 이은 엿새째의 대규모 시위로 진통을 겪었다. 워싱턴 D.C.에서는 백악관을 비롯한 곳곳의 과격 시위에 대처하기 위해 주 방위군이 동원되었다.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 시의 고속도로에서는 대형 유조 트럭이 수천 명의 시위대를 향해 돌진하여 대형 사고가 발생할 뻔했다. 다행히 트럭은 멈추었다. 최소 40개 도시는 통금을 실시했다.

블룸버그의 칼럼니스트인 존 어서스는 미국인들이 코로나19 대유행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살핀다. 그러한 그의 통찰력은 조지 플로이드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미국이 당면한 위기에도 적용할 수 있는 것 같다. 어서스는 영국의 정치학자 스티븐 룩스의 이론으로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세 가지 사고 방식들을 묘사한다. 그것들이 우리 도시의 불안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공리주의자들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한다. 이는 다수결 민주주의의 원동력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소수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이미 우리 나라의 역사 속에서 인종족 소수들이 숱하게 경험해온 바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우리 사회 안에서 “공동선”을 발전시키길 원한다. 그러나 한 사회의 공동선이 소수에게는 해당하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떤 이들은 인종적 소수가 운영하는 기업들이 폭력에 희생되더라도 변화를 위해선 꼭 필요하다고 최근의 폭력을 정당화한다. 이런 사고방식은 인종적 다수로 인한 소수 피해자의 고통을 가중한다.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자유가 최고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서스가 지적하듯이 시민들 모두가 개인으로 남으면, “개인 다수는 거리에서 잠을 자게 되고, 도시의 센터들은 비열한 자들로 넘쳐날 것이고, 소수의 부자들은 도박으로 이익을 취할 것이다.”

이 세 가지 가치관들은 미국 사회의 기초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들이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20세기의 영국 철학자 이사야 벌린에 의하면 그 대답은 “아니오”이다.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에 대한 반응들을 보라. 일부는 공리주의적인 다수와 함께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다수가 시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부는 행진한다. (심지어 일부는 폭력을 저지른다.) 다수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자원과 관용의 자유주의적인 결여를 항의하고 있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나는 인종차별, 조직적인 가난, 불의 혹은 폭력의 무고한 희생의 경험이 어떠한지를 잘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잘 아신다.

예수님은 로마의 점령 치하에서 유대인으로 살았다. 예수님은 너무 가난해서 “머리 둘 곳이 없다”(눅 9:58)고 말씀하셨다. 체포된 뒤에는 소위 “역사상 가장 불의한 재판”을 받으셔야 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데도 고통을 겪고 죽임을 당하셨다(이사야 53:9; 히브리서 4:15).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로마서 5:8).

그 결과 예수님은 이러한 위기에 대해 말씀하실 수 있는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계신다. 오늘은 윤리의 기초가 되는 성경 구절을 묵상해 보자.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이 명령은 우리 시대의 인종차별과 폭력이라는 재앙 속에서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그리고 공리주의적이고, 공산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갈등들을 우리 문화에 맞게 조화를 이루도록 해준다. 모두가 이 말씀을 실천한다면 인종적 편견이나 경찰의 잔인한 행위나 폭력 시위가 일어나겠는가? 다수가 소수를 억압하겠는가? 한 공동체의 일원이 다른 공동체의 일원을 핍박하겠는가? 개인이 부패한 세상에 홀로 남겨지겠는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삶의 원리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렇게 살 것을, 예수님의 본을 따라 모두를 사랑할 것을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삶과 사랑이 가능해지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할 수 있다.

(* 편집자 주 - 문화사역자 짐 데니슨 박사의 6월 1일 칼럼 발췌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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