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이드의 죽음에 폭력으로 반응하는 게 틀렸다면 올바른 방법은...

뉴욕 맨해튼의 명품 백화점 삭스 피프스 애비뉴는 6월 2일 고가의 상품 약탈을 방하기 위해 레이저 와이어로 건물을 두르고, 훈련된 경비견과 사설 경비원을 고용했다. 6월 2일 밤에는 시위들이 비교적 평화로웠으나. AP 통신은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 이후 최소 9,300명이 체포되었다고 보도했다.

어제 폭력에 대한 폭력은 올바른 대응이 아니라는 글을 썼는데, 반대 주장을 펼친 두 편의 글을 읽었다. 그 하나는 폭력 시위가 보스턴 티 파티 만큼이나 미국적이라는 주장이다. 뉴욕 타임스의 찰스 블로우 칼럼니스트는 “미국을 탄생시킨 보스턴 티 파티는 170만 달러의 재산 피해를 초래했던 것으로 추정한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나는 보스턴 티 파티가 어둠 속의 변장한 남자들이 일으킨 폭동이라 생각하지도 않고, 이 나라를 탄생시켰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조지 워싱턴은 가해자들의 “차를 파괴하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영국은 잃어버린 차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하며, 심지어 그 자신이 찻값을 지불하겠다고 제안했다.

조슈아 로슨 칼럼니스트는 “보스턴 티 파티 사건은 달빛 아래 세 시간 동안 비밀리에 완수된 행동이었다. 배도 승무원도 해를 입지 않았다. 영국 군인들과 피식민지의 애국자들이나 토리 왕권주의자들 간에 그 어떤 폭력이나 대면도 없었다.”라고 지적했다.

차를 제외한 유일한 손해는 선상의 부서진 자물쇠 한 개였는데, 다음날 애국자들이 새 것으로 교체했다. 부상을 입은 유일한 사람도 애국자였는데, 차 상자에 부딪혀 의식을 잃은 것이었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촉발된 과격 시위가 보스턴 티 파티와 유사해지려면, 당시 애국자들은 자국민의 재산을 파괴하고 자국 군인들을 위협해야 하고, 보스턴 거리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이웃의 집과 기업을 불태워야 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번 폭력을 정당화하는 또 다른 글은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서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내쫓고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는 그림을 보여 준다. 그에 대한 풀이로 “만일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실까?'라는 질문을 한다면? 상을 뒤집고 채찍을 휘두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그러나 내이선 W. 오할러랜이 지적하듯이, 그리스어로 쓰인 요한복음 2:15은 예수님이 성전에서 동물들을 몰아내기 위해 채찍을 사용하신 것이지 환전상들에게 채찍을 휘두르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해를 끼치거나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이번 폭력 시위를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과 유사하다고 말하려면, 예수님은 무고한 행인들에게 해를 입혀야 하고, 그들의 재산을 파괴해야 하고, 그들의 집과 기업을 불태워야 했다. 반대로 예수님은 최근 폭력에 희생된 이들과 매우 유사한 행동을 하셨다.

플로이드의 죽음에 대해 폭력으로 반응하는 것이 틀렸다면, 올바른 방법은 무엇일까?

시민권 운동의 아이콘인 존 루이스는 며칠 전 “폭동, 약탈 방화는 길이 아니다. 모여서 시위하라. 앉아서 혹은 서서 데모하라. 투표하라. 파괴적인 일을 하지 말고 건설적인 일을 하라. 역사는 비폭력, 평화 시위가 우리가 갈망하는 정의와 평등을 성취하는 길임을 몇 번이고 증명해 보였다.”라고 말했다.

존 루이스의 조언을 생각해 보자.

먼저 우리는 문제의 일부가 아니라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치셨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들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태복음 5:23-24).

인종 차별의 맥락에서 “형제들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은 무엇인가? 타인종들로부터 원망들을 만한 태도와 말, 행동과 무행동을 알게 해달라고 주님께 구하라. 아울러 용서와 화해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하자.

그런 다음 우리가 해법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 28:19)고 명하셨다. 여기서 민족은 곧 인종을 가리킨다. 초기 크리스천들은 15개 언어를 쓰는 각국의 유대인들을 환영했으며(행 2:9-11), 사마리아인들에게(행 8:5-8), 이방인들에게(행 10:34-43), 노예들에게(빌레몬 10), 그리고 여인들에게(행 16:13-15) 복음을 전했으며, 모든 문화적 장벽을 무너뜨렸다.

당신과 내가 우리 문화 속의 인종차별과 불의와 싸우기 위해 해야 할 그 모든 일을 다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를 할 수 있다. 우리 각자는 사회와 이웃의 삶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능력과 자원과 영적 은사와 영향력을 받았다. 우리는 거대한 위기가 우리의 대응을 막도록 허용해선 안 된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 우리는 인류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그분의 담대한 이니시어티브를 필요로 한다.

오스왈드 체임버스는 이렇게 충고했다. “당신 자신이나 다른 이의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 외의 것은 그 무엇도 신뢰하지 말라.” 어떻게 하면 그러한 은혜를 자라게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나 개인의 삶이 ‘베들레헴’이길 기대하신다.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내주하심으로 내 본래의 삶이 천천히 변모될 수 있을까? 하나님의 궁극의 목적은 당신의 아들이 내 유한한 몸 속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체임버스는 말한다.

(* 편집자 주 - 문화사역자 짐 데니슨 목사의 6월 6일 칼럼 일부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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