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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아드레이
윤효순  |  캘리포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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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6.05  23:5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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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노련했다, 식은땀 범벅인 나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단박 집안에 들게 했다. 나에게 똑바로 서 봐라. 고개를 돌려봐라. 팔을 들어봐라. 거절할 수 없는 명령을 쏟아냈다. 잘 따라 하는 몸짓을 보는 그녀의 얼굴에서 긴장이 풀렸다. 명령은 거의 따를 수 있었지만 팔을 올리라고 했을 때에는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나를 의자에 앉히고 살롬 파스를 어깨에 듬뿍 발라 주었다. 냉동고에서 야채를 잘게 잘라 얼린 봉지를 꺼내 어깨에 올려놓고 삼각보로 팔을 묶어 주었다.

그녀는 얼음 띄운 물과 애드빌을 건네면서 설명했다. “쇠골에 금이 간 듯하다. 응급실에 갈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오늘은 토요일이니 아프면 애드빌을 먹고 얼음찜질을 하며 기다리다가 월요일에 주치의한테 가는 게 좋겠다.” 먹먹했던 내 마음 안에 작은 줄기로 내려왔던 볕뉘가 환한 세상으로 나를 이끌어 주었다.

어릴 적에도 넘어진 기억은 없다. 그런데 작년, 여름도 거의 저물어가는 팔월 말이었다. 점심 후 걷기를 하다가 호되게 넘어지고 말았다. 가게에서 나와 이십여 분을 걸었으니 1마일은 훨씬 넘은 거리였을 것이다.

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펼쳐져 있는 하늘은 정말 예뻤다. 거기에 한껏 푸른 나뭇잎들도 바람에 힘을 입어 흘러가는 구름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열심히 바라보다가 호되게 넘어진 것이다. 난생처음의 경험을 했다.

왼발 앞부리를 뭔가가 막는 느낌이더니 이내 몸이 앞으로 기우뚱했다. 순식간에 내가 공중으로 솟구쳤다가 ‘탁’ 길바닥에 여지없이 곤두박질했다.

잠시, 아무 소리도 없는 동굴 속에 있는 느낌이더니 보이는 게 모두 노랬다. 파랬던 하늘도, 하얗던 구름도, 길가의 나무까지도.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떴을 때에는 지나가던 차 두 대가 멎어 섰고, 운전자들이 넘어져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염려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려고 벌떡 일어났다. 그들은 괜찮은가, 도움이 필요한가를 물었다. 괜찮다는 대답을 듣고 그들은 가던 길을 갔다.

나무 그늘로 옮겨 앉아서 몸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의식이 있으니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터. 다친 곳을 짚어봤다. 팽개쳐질 때 바닥에 닿은 부분은 오른쪽 어깨 뒤쪽, 그 부분에서 작은 통증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통증이 다친 곳의 앞쪽 쇄골 부분에서 느껴졌다. 어깨를 쳐들 수 없는 아픔이었다.

이 사태를 수습하자면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한테 알려야 할 텐데 전화기조차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방법은 하나. 1마일 넘는 거리를 걸어서 가게까지 가는 것이었다. 그 거리가 망연하게 느껴졌다.

다친 어깨를 보호하기 위하여 오른팔을 몸에 붙이고 오른손으로 셔츠 앞섶을 단단히 잡았다. 다행히 아프지 않고 그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몇 걸음을 걸으니 자꾸만 식은땀이 나고, 쏟아지는 햇빛 속에서도 앞이 깜깜해졌다. 노랗게 변했던 세상이 이젠 먹구름이 내려온 듯했다. 응급실에 가봐야 할 듯했다. 언제나 많은 사람이 기다리는 응급실, 생명의 위협하고는 상관없는 환자로 몇 시간을 앉아 있어야 할 것을 생각하니 여전히 절망이었다.

마침 버스를 기다리는 벤치가 있었다. 얼마를 거기에 있었을까. 깜깜했던 내 생각 속에 번뜻 비치는 햇살이 있었다. ‘닥터 아드레이’. 세탁소 손님인 그녀는 얼마 전 은퇴했다. 손수 가꾸며 살기에 적합한 아담한 집을 장만한 뒤 집들이에 초대받은 적이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그녀의 집이 생각난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집을 어찌 연락도 없이 찾아가서 초인종을 누를 수 있단 말인가? 그럴 수 없다는 생각이 컸다. 미국 생활 40여 년인 지금까지, 아무리 가까운 친구나 가족이라 할지라도 연락 없이 초인종을 누르질 못했다. 얼마나 큰 무례인가! 더구나 그녀는 가족도, 친구도 아닌 가게 손님 중의 한 사람이질 않은가!

벤치에 앉아서 갈등하고 있었다. 한참 생각을 정리한 난 가게보다 훨씬 가까운 그녀의 집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무겁게 걸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엔 여행을 좋아하는 그녀가 그 시간 여행 중이기를 바라는 마음과 기본의 예의조차 모르는 사람이라 낙인 찍히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종잡기 어려운 마음으로 그녀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렸다. 놀라고 염려하는 그녀의 눈빛, 어둡던 내 염려를 뚫고 강하게 들어와 버린 볕뉘임을 단박에 알아버렸다.

하나님의 손길로 꽂아 두신 선명한 볕의 뉘, 그날 볕뉘는 무례함조차 개의치 않고 따뜻한 눈빛과 노련한 치료를 통해 퍼져 나왔다. 잔뜩 움츠리고 있던 난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두신 사랑을 느꼈다.

다른 사람의 절망을 같은 마음으로 느껴 주는 눈빛은 정녕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였다. 그 통로를 통해 그녀는 손님이 아닌 이웃, 가족으로 내 안에 들어왔다. 몸은 그때의 아픔을 잊은 지 오래되었으나, 지금도 그날 그녀의 눈빛과 행동은 내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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